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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식주衣食住

[의식주衣食住 : 화폐와 유통] 잉여 생산물과 상업

by 롱카이 2026.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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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高麗의 잉여 생산물

고려는 쌀과 잡곡의 합계가 이전보다 2-3배 증가하며 경제 성장을 이뤘다
고려는 쌀과 잡곡의 합계가 이전보다 2-3배 증가하며 경제 성장을 이뤘다

송宋이 압도적인 농업 생산력으로 부강해지는 동안 고려高麗는 새로운 쌀 품종이 도입되지 않아 거름을 주는 시비법으로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렸습니다. 덕분에 신라新羅 때보다 식량 생산량이 2배에서 3배 정도로 상승했습니다. 문제는 순수 쌀 생산량이 2-3배 증가한 것이 아닌 밭에서 키운 조나 기장, 보리 등 잡곡을 포함해서 상승한 폭이어서 가치가 가장 높았던 쌀 생산량은 매우 높은 편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옷감은 필수품이었기에 옷감 생산은 좋은 부업거리였다
옷감은 필수품이었기에 옷감 생산은 좋은 부업거리였다

그래서 백정들은 곡물 농사 뿐만 아니라 각종 다양한 부업으로 추가 수익을 노렸습니다. 가치가 높은 부업은 배추나 무 등 채소나 돼지 등 동물을 키운 뒤 이를 시전에 파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이건 토지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백정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보유하지 않았으니 다른 부업거리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백정들이 가장 흔하게 한 부업거리는 옷감 만들기였지요. 옷은 먹는 것만큼이나 인간이 사회에서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필수품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옷감은 언제나 수요가 있었기에 옷감을 만들어 판매하며 수익을 얻었지요. 그래서 고려高麗 때 민중은 수익을 위해 작물과 옷감을 생산했기에 그만큼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었습니다.

 

 

 

  • 물물교환이 주류였던 시장

각 도시마다 물건들의 가치를 자체적으로 책정해 물물교환했다
각 도시마다 물건들의 가치를 자체적으로 책정해 물물교환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전市廛이 아닌 읍내마다 형성된 5일장 같은 시장에는 물물교환으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국가에서 화폐를 발행하긴 했지만 화폐 가치가 너무 비싸 평범한 백정들은 구경도 못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싼 화폐를 들고 있어도 먹거리와 옷 등 생필품을 사기에는 가치가 지나치게 높아 가지고 있어봤자 쓸모가 없었지요. 때문에 읍내마다 내려져 오는 암묵적인 규칙 하에 각 상품의 가치를 책정해 물물교환했습니다.

물물교환을 할 때 옷감 원단에서 필요한 만큼 잘라 판매자에게 주며 물품을 구매했다
물물교환을 할 때 옷감 원단에서 필요한 만큼 잘라 판매자에게 주며 물품을 구매했다

그리고 구매하는 입장에서 물물교환을 위해 가지고 간 상품은 대부분 쌀이나 옷감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돌돌 말아 다녀도 가벼운 옷감이 주로 물물교환 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백정은 집에서 베를 짜 만든 삼베 옷감을 두루마리로 말아 들고 다니며 시장에서 판매자가 원하는 만큼의 옷을 잘라 주고 물품을 구매했습니다. 또는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옷을 판매하는 상인들 역시 여러 개의 원단 두루마기를 들고 다니며 거래했습니다.

 

 

 

  • 부유한 자들을 위한 화폐

고려 최초의 화폐 건원중보
고려 최초의 화폐 건원중보

한편 막대한 재산을 가진 귀족들이나 나라에서 녹봉을 받으며 그럭저럭 살만했던 중인들은 생활 수준도 높았고 먹고 입는 것부터 비싼 것들만 골라 사용했습니다. 이런 값어치가 나가는 것들은 물물교환으로 거래하기에는 가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국가에서 발행한 화폐를 이용해 거래했습니다. 이들이 일상에서 사용한 화폐는 동전으로 송宋의 화폐 정책을 모방해 고려高麗 황실이 주조한 동전이나 철전을 화폐로 사용했습니다. 건원중보를 시작으로 해동통보, 삼한통보 등 다양한 화폐가 발행되었지요. 이 화폐의 가치는 지금 가치로 약 10,000 정도 되는 가치로 다점茶店에서 차를 음미하거나 고기와 해산물을 구매할 때 사용했습니다.

고액 거래에 사용된 은병
고액 거래에 사용된 은병

그리고 귀족끼리 부동산이나 토지 등 값어치가 많이 나가는 물품을 거래하기 위한 화폐도 따로 존재했습니다. 은을 녹여 조롱박처럼 만든 은병銀甁, 또다른 명칭으로 활구闊口라 불린 화폐였습니다. 은병銀甁은 은 1근으로 만든 화폐였기에 지금 가치로 약 300만원에서 400만원 정도의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우 비싼 화폐였기에 귀족들이나 황실에서만 사용하던 화폐였습니다.

 

 

 

  • 국가의 철저한 통제 하에 운영된 상업

고려 때 시전과 각종 시장은 국가에서 통제했다
고려 때 시전과 각종 시장은 국가에서 통제했다

고려高麗 때 잉여 생산물 총량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소금이나 철강, 차 같이 부가가치가 높은 물품은 국가에서 엄격하게 통제하며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가치를 창출했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시전市廛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상업 활동을 철저히 통제하며 수익을 얻었습니다.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해 시전市廛에서의 물가 조절과 상품 종류 등에 대하여 통제를 가하며, 관청에서 허가한 상품 이외에는 마음대로 팔지 못하게 하였는데, 만일 이를 범할 경우에는 엄히 다스렸다고 합니다. 때문에 시전市廛에서는 경시서로부터 상품의 가격을 평가받고 세인稅印을 찍은 다음에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비단 시전市廛 뿐만 아니라 다른 시장도 국가에서 통제했지요. 잉여 생산물이 많지 않았기에 국가에서 충분히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정부 행정력이 약화되며 무신 세력, 권문세족, 사찰이 부를 축적하며 기업화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정부 행정력이 약화되며 무신 세력, 권문세족, 사찰이 부를 축적하며 기업화되었다

물론 국가 행정체계가 무너진 무신정권 때부터 국가의 상업 통제는 약화되었습니다. 실권을 잡은 무신은 군사력으로 상인들을 협박해 상납하게 하거나 좋은 물품을 독점하며 부를 쌓아갔습니다. 장사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무신들의 부하가 되어 재산을 불리며 부호富戶가 되었으며, 몽골지배기 때는 권문세족 아래로 들어가 권문세족의 재산을 불려주며 본인도 막대한 부를 누렸습니다. 또한 사찰은 각종 옷감은 물론 기와나 소금, 심지어 술을 생산해 지방에 판매하며 지방 경제를 손에 쥔 기업이 되었습니다. 혹은 사찰 안에 보寶라는 기관을 설치해 신용 증서를 작성한 뒤 곡식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토지나 집을 담보로 잡아 이자를 받는 신용 대출도 활발하게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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