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江南 개발과 대월大越에서 수입한 쌀 품종과 폭발한 생산력

장강長江(현대 중국어: 창장长江)은 히말라야 고원에서 시작해 황해로 유유히 흐르는 큰 강으로 압도적인 수자원과 밀려오는 비옥한 토양으로 가득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비옥한 만큼 다양한 야생 식물들이 터전으로 노리는 곳이었고, 때문에 장강長江이 흐르는 강남江南 (현대 중국어: 장난江南) 일대는 코뿔소와 남중국호랑이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밀림지대였습니다. 그리고 한漢 때까지만 해도 야생인 남만南滿의 땅으로 여겨졌지요.

하지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손권이 통치한 것으로 유명한 오吳를 시작으로 여러 중화왕조가 강남江南의 가치를 알아보고 오랜 세월에 걸쳐 밀림을 하나씩 밀어내며 인류 문명의 터전으로 개발했습니다. 이후 수隨와 당唐도 강남江南 개발을 국가사업으로 진행해 마침내 송宋 시기에 사람이 도시를 이뤄 사는 땅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강남江南이라는 압도적으로 비옥하고 쌩쌩한 토지를 얻었지요.

또한 대월大越 아래에 있는 나라인 참파에서 등장한 점성도 벼 품종이 대월大越을 거쳐 송宋에 유입되는 행운도 더해졌습니다. 점성도는 가뭄에 강하고 빨리 자라는 벼 품종이어서 척박한 산간지방에 심어도 반년이면 후딱 자랐습니다. 이 좋은 벼를 대월大越이 참파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얻어 사용하고 일부를 송宋으로 수출한 것이지요.

드넓고 비옥한 강남江南이라는 무대와 점성도라는 강인한 벼 품종이 만나니 송宋의 쌀 생산량은 말 그대로 폭발했습니다. 후대 사학자들이 농업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송宋은 일년에 농사를 2-3번 지으며 쌀의 물량을 말그대로 쏟아냈습니다. 강남江南에서 말도 안되는 물량이 쏟아져나오니 송宋의 다른 지역에서 농사가 잘 안되어도 쌀이 풍족한 천국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쌀이 곧 돈이었던 송宋 시기에 쌀 생산량의 폭발은 경제력의 대상승을 의미했지요.
- 연이어 등장한 신기술과 혁신

쌀 생산량의 급증으로 여유가 생기자 이를 바로 기술과 지식의 발전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휴경지로 쉬게 둔 뒤 다시 농사짓는 방법이 아닌 인분과 가축 분뇨, 삭힌 식물, 진흙 등으로 거름을 만들어 땅을 다시 비옥하게 하는 숙전화熟田化 기술이 등장해 안 그래도 비옥한 땅이 지력을 잃지 않고 쌀을 계속 쏟아내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보리를 심고 바로 쌀을 심는 이모작과 진부농서陳腐農書 같은 전문 농업 지첨서를 전국에 발간해 모든 농민들이 전문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물의 낙차가 가져오는 운동 에너지를 활용해 사람보다 압도적인 힘으로 먼 곳의 물을 끌어오는 수차水車나 앉아서 슥슥 밀어내며 편하게 모내기할 수 있는 양마秧馬 등 쌀 생산량을 높이는데 큰 도움을 주는 기술들이 연달아 등장했습니다. 덕분에 농민은 힘을 적게 들이며 더 넓은 면적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쌀 생산량은 하늘을 뚫고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 강남江南에서 넘쳐나는 쌀을 천하 전역으로 바로 바로 유통할 수 있었습니다. 송대宋代에 대운하 유통망이 완성되어 천하의 모든 곳에 쌀을 운송할 수 있었습니다. 중화 왕조는 큰 강을 따라 대도시들이 존재했는데 대운하 덕분에 강남江南에서 배로 막대한 쌀을 실은 배를 여러 큰 강으로 바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어느 지역만 발전하고 다른 곳은 낙후되는 격차가 발생하지 않고 송宋 전체가 번성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인구는 폭발하고 도시는 불이 꺼지지 않으며 거리에 풍요가 넘쳐나다

쌀 생산량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냐면, 송宋의 인구가 1억을 넘었습니다. 전세계에서 최초로 인구 1억을 돌파한 나라가 송宋입니다. 저 당시 요遼의 인구는 400만명, 고려高麗 인구는 300만명, 일본日本은 700만명, 대월大越은 100만명이었습니다.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나 전세계로 눈을 돌려도 이슬람 제국인 압바스 칼리파국 인구는 전성기 때 6,000만명이었고 기독교 세계의 강국인 프랑스 왕국도 1,200만명이었습니다.

송宋의 수도 개봉開封(현대 중국어: 카이펑开封)의 인구는 150만명이었습니다. 성도成都(현대 중국어: 청두成都)의 인구는 50만명, 소주蘇州(현대 중국어: 쑤저우苏州)는 50만명이었지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고려高麗의 수도인 개경開京 인구는 30만명, 일본日本의 천년수도 헤이안쿄平安京 인구는 10만명, 대월大越의 수도 탕롱乘龍 인구는 10만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 외 인구가 많아 번성한 파티마 칼리파국الخلافة الفاطمية의 카이로القاهرة나 압바스 칼리파국الْخِلَافَة الْعَبَّاسِيَّة의 수도 바그다드بغداد의 인구는 각각 20만명이었지요. 다른 제국의 대도시와 비교해도 송宋의 대도시가 압도적입니다.

필수 자원인 쌀이 다 소화도 못할 정도로 풍부해지자 남은 잉여 생산물로 다른 것에 투자하며 사회는 더더욱 발전했습니다. 남아도는 쌀로 술은 물론 조청 등을 만들어 각종 과자와 간식거리를 만들어 길거리에 파는 것은 기본이고, 쌀로 해외나 다른 지역에 있는 물자를 구매해 자기 지역에 판매하는 상인들이 등장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풍요로워지자 사람들은 마음에 여유가 생겨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도적이 많이 사라져 밤거리가 안전해졌고, 황제의 허락 덕분에 한밤 중에도 야시장이 열려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실업률도 낮았으며 매우 다양한 직업들이 등장했습니다. 쌀을 재배하는 농민 뿐만 아니라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농민 혹은 차를 재배해 판매하는 농민 등 다른 기호식품 전문가들이 대거 등장했고, 밀을 제분하는 직업이나 물레방아 기술자 등 여러 직업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등장했습니다. 거리에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말하는 이야기꾼이 돈을 받으며 재미있는 설화를 들려줬고 주문한 음식을 배달하는 배달꾼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연회 자리를 마련해 자기 위에 음식을 예쁘게 마련하는 출장 뷔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직업도 등장했습니다.

심지어 각 가정에서는 나무나 숯이 아닌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광산을 대규모로 운영할 수 있는 탄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따뜻한 방에서 지내며 간편하게 취사를 해 따뜻한 밥을 해 먹었습니다. 또한 대규모 방직기나 물레방아 등 각종 기계가 등장해 쌀 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쌀과 옷 가격은 낮아져 가난한 사람도 먹고 사는 걱정은 하지 않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 정부의 정책과 지폐의 등장

송宋이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역할도 컸습니다. 정부는 야간 통행과 상업을 허용했으며, 상업 활동에 정부 개입을 최소화해 낮보다 더 밝은 야시장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덕분에 수도 개봉開封은 밤이 오지 않는 도시라는 별명인 불야성不夜城을 얻었지요. 이렇게 거래가 활발해지자 도매업과 소매업 간의 거래를 중개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전문 중개업자들이 등장했으며 특정 상업 분야의 동향을 공유하고 중요한 내용을 논의하는 상업 조합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정부는 몇몇 철광석을 보유해 연간 10만톤 이상의 철강을 생산했습니다. 그렇게 생산한 철강으로 농기구와 병기를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남아도니 동전을 만들어 시장에 공급했습니다. 북송北宋 초기에는 국가에서 발행하는 동전을 화폐로 삼아 물건을 거래했습니다. 그러나 쏟아지는 물건만큼 수요도 폭증해 물가가 높아져 연간 동전 60억개 씩 찍어내는데도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부유한 상인들이나 국가 기관에서 대규모 물자를 거래할 때 어음을 작성한 뒤 나중에 받으러 가면 동전을 수레 단위로 받는 일이 생기며 불편한 점이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성도成都 지역은 동전으로 사용할 구리 생산량이 적어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철로 철전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철전이 많으면 무거워 부담이 더 컸는데 문제는 철전의 가치는 동전의 1/10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무거울데로 무거운데 가치는 낮으니 더 많이 가지고 다녀야 했지요. 결국 성도成都는 주민의 합의 하에 철 대신 종이로 만든 돈을 만들어 거래했습니다. 그것이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로 성도成都 지역에서 쓰였으나 가볍고 생산 비용이 적은 장점을 주목받아 송 황제의 명령으로 전국에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송宋 초기부터 교자交子가 천하에 활발하게 거래되었으며 황제의 명으로 정부에서 교자交子의 가치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위조지폐를 만드는 자는 엄격하게 처벌하며 신용을 보장했습니다. 물론 거란이나 여진 등 북방 유목민족이 대규모 침공을 해 전면전이 벌어질 때마다 군비 확보를 위해 정부에서 지폐를 남발하며 가치를 떨어뜨리긴 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 때는 교자交子 발행을 남발해 신용을 잃자 전인銭引이라는 지폐를 발행하고, 여진의 침입으로 전인銭引도 남발해 가치가 떨어지자 회자會子라는 지폐로 교체해가며 신용을 유지하고 물가를 안정화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미국 연준과 비슷한 국가 역할을 한 것이지요.
- 오랜 전쟁에도 버틴 송宋

송宋의 압도적인 경제력은 북방 유목민족이 활개하는 시대에 송宋이 오래 존속하는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거란이 세운 요遼에게 연운 16주를 상실한 상태에서도 압도적인 인구와 경제력을 유지해 거란이 침입을 망설이게 만들었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여진의 금金에게 화북華北을 잃어버리고 강남江南으로 내려가 남송南宋을 세웠음에도 오히려 인구와 경제력이 더더욱 높아져 더 큰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송宋의 저력을 천하에 보여준 사건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몽골제국의 침입을 무려 40년 이상 버텨내며 저항하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몽골제국이 만주부터 동유럽 평원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할 때 남송南宋은 경제적으로 정점에 이룬 부국이었습니다. 이에 몽골은 남송南宋의 넘쳐나는 자원을 노리고 사방에서 수차례 침공했는데 그걸 버텨냈습니다.

당시 남송南宋은 인적 자원, 물적 자원, 지폐 등 화폐와 식량 및 생필품 등을 합쳤을 때 전세계 GDP의 약 20%에서 30%를 혼자 차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몽골제국이 악을 쓰고 십자군 전쟁이나 종파 전쟁인 피트나فتن로 막강한 공성전 역량을 갖춘 이슬람 전문가는 물론 유럽의 금은보화와 드넓은 유라시아 초원을 질주한 모든 전사를 기병으로 모집하고 중국의 보병 만명 이상 등 전세계의 자원을 모두 긁어모아 공격하는데도 남송南宋은 탄탄한 급여로 병사들에게 봉급을 꼬박 주고 돈으로 고용한 일꾼 덕에 수많은 요새와 배를 만들어 방어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멸망 직전까지 남송南宋 경제는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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