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자녀에게 동등하게 재산이 상속된 고려高麗 사회

고려高麗의 법과 사회적 풍습에 따르면 자녀에게 재산이 균등하게 상속되었습니다. 장자에게만 물려주는 형태가 아닌 모든 형제자매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줘야 했습니다. 또한 자녀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동등하게 재산을 받았지요. 고려高麗 때에는 농사를 지을 토지가 곧 재산이었기에 논을 자녀 수만큼 나눠 분배했습니다. 이는 황실과 귀족 뿐만 아니라 백정은 물론 노비와 천민도 동등하게 적용되는 규칙이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모두가 동등하게 받기에 자녀로써의 의무도 다함께 졌습니다. 부모와 선조를 모시는 제사祭司는 첫째부터 막내까지 돌아가며 지냈지요. 물론 고려高麗 당시의 제사祭司는 유학에서 하는 조상 위패位牌를 모시는 제사祭司가 아닌 부처님께 선조와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불공佛供이었습니다. 여튼 불공佛供이나 집안 잔치 등 집의 큰 일은 자녀들이 돌아가며 수행했지요.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는 것이 보장되었기에 그 대가로 가족사에 모두가 참여한 것입니다.
- 여성도 재산을 받아 외척의 사회적 지위가 강한 사회

불교佛敎에서 강조한 평등사상에 의해 성별에 따른 차등이 법률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여전히 여성차별적인 사회였지만 적어도 재산 상속이나 가정사에서는 동등했지요. 여성도 재산을 똑같이 물려받으니 자연스럽게 여성 쪽 가족인 외척의 힘도 강했습니다. 애초에 고려高麗 건국 배경도 태조 왕건이 호족과 연합하기 위해 혼인을 한 것이기에 출발부터 외척의 힘이 강한 상태로 시작했지요. 그래서 황실과 귀족 사회는 외척이 친척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집안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 균등 분배가 가져온 딜레마

문제는 농사를 지어야 하는 저 시대는 사람이 많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에 일단 많이 낳고 봤습니다. 그러면 한 집안에 자녀가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7명, 8명을 넘었지요. 그럼 땅을 많게는 8개로 나눠 분배해야 했습니다. 땅이 아주 넓다면 당장은 문제가 없었지요. 하지만 이런 일이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지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낳은 자녀를 보수적으로 4명으로 집계하고 논 1024평을 상속한다 계산해보죠. 한 세대는 1024평을 4로 나눠 256평을 얻습니다. 다음 세대는 64평을 얻고요. 그 다음 세대는 16평, 다음은 4평, 마지막은 1평 밖에 못 얻습니다. 1024평이라는 큰 논을 가져도 6세대 만에 1평으로 거덜나는 겁니다. 그 다음 세대는 1평마저 나눠야 하고요.

이는 곧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귀족이든 백정이든 논과 밭으로 먹고 사는 이들은 세대가 지날수록 재산이 줄어드는 현상을 목격했지요. 그리고 토지는 사람이나 화폐처럼 적은 상태로 시작해 많이 불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얄짤없이 차감되었습니다. 이에 대항해 나름대로의 저항을 하긴 했습니다. 백정이라면 황무지에 자발적으로 가 개간하며 농지 면적 자체를 늘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고려高麗 초기에는 그동안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많아 주변 황무지를 화전하며 천천히 개간해갈 수 있었지요. 없다면 갯벌에 흙을 붓는 간척을 해서라도 땅을 넓혔습니다. 귀족이라면 공을 세워 더 많은 토지를 하사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혹은 같은 집안 사람끼리 결혼하는 근친혼을 해 논의 평수를 유지했지요. 고려高麗 때 황실과 귀족이 근친혼을 한 현실적인 원인이 바로 저겁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반도 땅이 넓은 편도 아니고 개간할 수 있는 황무지도 한정되어 있으니 이를 모두 개간하면 더이상 넓힐 곳이 없었습니다. 그럼 남은 건 뭡니까? 서로의 재산을 뺏는 아귀 다툼입니다. 실제로 고려사高麗史 기록에 따르면 고려高麗 중기 때부터 집안의 재산이 부족하자 형제자매끼리 서로 더 많은 재산을 얻기 위해 부모 유언장을 조작하거나 몰래 재산을 빼돌리다가 적발되어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슬슬 나오기 시작합니다. 귀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형제 중 관직과 권력이 더 높은 쪽이 다른 형제를 힘으로 찍어누르고 재산을 강탈하기도 했습니다. 막장인 콩가루 집안으로 변했지요. 그나마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집안 형제들 중 누군가가 백정 신분을 버리고 어느 귀족의 노비로 자진해 들어가 귀족 소유의 토지에서 농사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마저도 귀족은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고려高麗 말이 되면 균등 상속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백정은 이미 재산이 거덜난 상태가 되어 다들 자진해 노비가 되었고 귀족끼리 치고박고 싸웠습니다. 무신정권 때는 무신이 다른 무신을 처형하고 재산을 뺏는 막장이 펼쳐졌고, 몽골지배기 때는 권문세족들이 땅을 공유해 재산을 나눠 가지면서도 서로 더 얻겠다고 암살하는 등 치열한 암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도 서로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한 집안 싸움이 치열했고요.

이것이 균등분배의 딜레마로,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에 따라 균등하게 재산을 분배하는 이상적인 법률이 막장 사회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지요. 균등분배를 하면 세대가 지날수록 가난해져 사회가 무너지고 균등분배 개념 자체가 유명무실해집니다. 당장 상속해줄 재산이 없으니 안에서 적은 재산을 가지고 싸우다 그마저도 떨어지면 다른 집안의 재산까지 노리는 아귀도가 펼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조선朝鮮 때 장자에게 모든 재산을 몰아주고, 그 대가로 장자가 집안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도 조선전기朝鮮前記에는 장자 외 자녀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리지 않고 재산의 일부를 상속해줬지요. 그마저 사라진 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소빙하기 3연타를 맞아 토지 자체가 박살나 재산 상당수가 날라간 조선후기朝鮮後記 때부터입니다. 그 때는 진짜로 줄 재산이 없어 장자에게만 줄 수 밖에 없었지요. 나머지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 한자문화권이 겪은 균등분배의 딜레마

균등상속의 딜레마는 한국 뿐만 아니라 한자문화권 전체가 가진 딜레마였습니다. 특히 중국이 이 딜레마에 항상 빠졌지요. 넓은 화베이華北 평야를 비롯한 각종 드넓은 평야를 가진 중국은 왕조 초창기에 넓은 땅을 민중에게 분배하고 균등상속 원칙에 따라 다음 세대에게 땅을 주며 모두에게 좋은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땅이 넓었으니 걱정 없이 자녀에게 모두 분배할 수 있었지요.

허나 100년이 지나면 이제 슬슬 분배할 땅이 고갈되며 쪼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헌데 중화가 보유한 평야 땅의 비중은 적으니 산간 지역을 개간하는 등 노력을 하다 150년이 지나면 그마저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농민들은 가난해지고 국가는 세금이 줄어 세율을 높이며 착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가난해진 농민들은 참다 참다 더이상 못 참고 봉기하며 들고 일어났습니다. 후한後漢 말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당唐의 황소의 난, 명明의 이자성의 난, 청淸의 태평천국의 난 모두 균등분배가 가져온 딜레마로 벌어진 대규모 농민 봉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황제가 축출되고 지방에서 유력 가문이 군벌로 부상해 군웅할거 시대가 펼쳐지고 궁극적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지요.

일본 역시 균등분배의 딜레마에 빠져 사회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몰락 원인이 균등분배의 딜레마였지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쇼군은 사무라이에게 영지를 나눠줬으며 균등분배로 상속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물론 한반도보다 비옥한 토지가 훨씬 적은데다 섬이어서 추가로 얻어낼 토지가 없는 일본은 몇세대가 안되어 토지가 심각하게 부족해졌고 사무라이의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그 상태에서 몽골이 침공하자 막부幕府는 막대한 비용을 소진하며 몽골을 막아냈는데 정작 공을 세운 사무라이에게 나눠 줄 토지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사무라이는 막부幕府의 무능에 분노해 천황 편에 서 봉기를 일으켜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몰락시켰습니다.

이 외에도 좁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수시로 권력 다툼에서 한 편에 서 반대편을 몰락시키고 그 쪽의 토지를 얻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는 차기 천황 자리를 두고 벌어진 암투에 여러 사무라이가 가담해 반대편 사무라이를 처형하고 그 토지를 뺏는 전장이었고, 오닌의 난은 차기 쇼군 자리를 두고 귀족과 사무라이가 대거 참전한 대규모 내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 다이묘大名가 어부지리로 권력을 얻었지요. 물론 그 다음은 천하통일을 명분으로 남의 땅을 빼앗는 끝없는 전쟁으로 얼룩진 센고쿠 시대戰國時代의 개막이었습니다.

권력자인 사무라이끼리는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토지를 얻은 반면, 그런 힘이 없는 민중은 처음에는 균등분배를 하다 문제가 생기자 일찍이 장자계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럼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장자는 토지를 물려받고, 동생들은 사무라이 휘하의 병사로 들어가 전쟁에 소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전쟁 끝에 평화가 온 에도 막부江戶幕府가 되자, 군인이 필요없어졌습니다. 이에 동생들은 받은 적은 상속 재산을 바탕으로 가게를 차려 운영하고 자녀를 한 명만 낳는 등의 방법으로 재산 상속의 딜레마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모두 균등분배의 딜레마에 빠졌는데 예외도 있었습니다. 중국 남부의 월남이었지요. 균등상속의 딜레마는 상속할 토지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럼 토지가 계속 생기면 그 딜레마에 빠지지 않지요. 그리고 월남은 실제로 땅을 계속 얻으며 균등분배의 딜레마에서 벗어났습니다. 건국 초기 대월大越(월남의 옛 명칭)은 시작부터 남쪽에 있는 비옥한 토양에 눈을 돌려 활발한 남만정벌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했습니다.

왜 남쪽이나면 동쪽은 바다이고 서쪽은 높고 험준한 안남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은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는 중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남쪽에는 참파라는 힌두교 기반의 연립 왕국이 있었지요. 한국사의 가야처럼 지금의 다낭沱㶞(현대 베트남 문자: Đà Nẵng)을 중심으로 여러 왕들이 연합한 참파는 연립 왕국이었기에 결속력이 낮았습니다. 그래서 대월大越은 참파의 왕국들을 하나씩 멸망시키며 땅을 조금씩 빼앗고 그걸 민중에게 나눠주며 균등분배를 해도 땅이 크게 줄어들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월大越 입장에서는 참 고맙게도 참파와 크메르(현 캄보디아의 옛 왕국 명칭)가 메콩 강 일대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싸우며 국력을 소진해줬습니다. 그래서 참파와 크메르가 싸울 때 야금야금 참파의 영토를 뺏어 다낭沱㶞에서 빈딘省平으로 밀어냈고 중요한 메콩강 삼각주 일대에 자국민을 이민 보내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어짜피 메콩강 삼각주는 참파와 크메르 양쪽이 서로 치고박고 싸우며 주인이 계속 바뀌었기에 어느 사람이 사는지 알 겨를이 없었거든요. 행정의 공백이 생긴 곳에 들어간 월남 사람들만 주인 없는 좋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강 건너 싸움 구경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끝내 참파를 멸망시키고 크메르를 대규모 침공해 크메르가 겨우 얻어낸 메콩강 하류 지역을 전부 대월大越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부지리를 제대로 얻었지요. 덕분에 대월大越은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元朝 때까지도 균등분배 원칙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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