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714 [종교 사회宗敎司會 : 법과 형벌] 자력구제 국가가 책임지지 못하니 스스로 방어하라자력구제自力救濟란 경찰이나 법원 등 국가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본인 신변과 권리를 스스로를 방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누군가 공격한다면 나를 보호하기 위해 흉기를 휘두르거나 폭력을 구사하는 행위를 의미하지요. 현대 사회는 오직 경찰과 군대만이 폭력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해 개인의 사적인 폭력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하지만 고려高麗 때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지요. 고려高麗는 고려율高麗律에 따라 사적인 보복이나 사법권 집행을 엄히 처벌했습니다.예를 들어, 내 물건을 훔쳐 간 도둑을 관청에 고발하지 않고 사적으로 잡아 가두거나 때리면 오히려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맞닥뜨린 범죄에 대한 방어적 자력구제自力救濟는 예외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2026. 10. 2. [종교 사회宗敎司會 : 법과 형벌] 죄와 벌 성문법으로 유지된 고려高麗청동기 시대와 고대 초창기 문명은 지도자의 말이 곧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어도 판단이 완벽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한 말을 기억하고 뱉은 말을 책임져 백성들의 신뢰를 끝까지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또한 인성이 좋지 않은 지도자는 권력을 남용해 말을 수시로 바꿔가며 신뢰를 내팽겨쳤지요. 그리고 그런 지도자는 대부분 부하의 반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며 아무리 하늘이 선택한 지도자라 해도 독단적인 선택으로 법을 만들고 유지하기란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양한 사람의 검증을 거쳐 문자로 기록해두고 지키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지도자 개인은 그 법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인 것은 유지하고요.여튼 .. 2026. 10. 1. [종교 사회宗敎司會 : 법과 형벌] 치안을 유지한 방법 사회 치안의 중요성치안은 사람들이 살면서 길거리를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잠을 잘 때 기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등 사회적 안전함을 의미합니다. 즉, 사회적 신뢰감이 곧 치안이지요. 지금은 사회 안정과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들이 치안 향상 및 유지에 목숨을 겁니다. 허나 황제가 통치하는 왕국 시대에는 조금은 다른 이유로 치안이 중요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왕권 강화와 통치력 입증이었습니다. 중세의 왕들은 아직까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지방의 유력한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왕권에 도전하고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요. 때문에 왕과 황제는 일부러 중앙군을 지방으로 보내 치안을 유지하고 비적 무리를 체포하며 국가가 도적을 소탕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왕이 전.. 2026. 9. 30. [종교 사회宗敎司會 : 유학과 교육] 특별편 : 유학이 나라를 망친 원인인가 조선朝鮮은 유학儒學 때문에 정체해 망했다는 인식아직도 많이 회자되는 주장인데, 조선朝鮮은 고리타분한 유학儒學 때문에 망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대부분 제사 같은 유교儒敎 의례에 반대하며 나오는 대표적인 주장이지요. 그리고 아무래도 조선朝鮮의 말로는 일본제국에게 식민지배를 당한 것이기에 이런 주장이 크게 공감을 받더군요. 근데 정작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제국은 유학儒學이 꽃피운 에도 막부江戶幕府에 변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근대를 맞이한 유학儒學 국가들의 운명에도 막부江戶幕府는 성리학性理學과 양명학陽明學이 발달한 시기로 일본日本에서 유학儒學이 꽃피운 시기입니다. 특히 양명학陽明學의 핵심인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유학儒學의 근본 사상인 부국강병富國强兵은 일본日本을 빠르게 근대화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쿠로후네 사건.. 2026. 9. 29. [종교 사회宗敎司會 : 유학과 교육] 숭유억불 형이상학을 담은 성리학性理學의 등장초기 유학儒學과 훈고학訓詁學은 철저하게 정치만 따졌습니다. 때문에 개인이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없었지요. 그런 것은 정치에 하등 쓸모없는 괴력난신으로 치부했습니다. 허나 사람은 살면서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고 싶어하고 세상의 흐름을 알고 싶어합니다. 이 공백을 불교佛敎가 채웠지요. 고려高麗 유학자들도 훈고학訓詁學은 정치 제도를, 불교佛敎의 사상은 삶의 자세를 얻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즉, 유학자들은 개인 수양은 불교佛敎의 철학을 받아들이고 유학儒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이념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분리했지요.이런 두 사상의 공존은 형이상학을 품은 성리학性理學의 등장으로 변했습니다... 2026. 9. 28. [종교 사회宗敎司會 : 유학과 교육] 한자문화권에 퍼진 성리학 유학儒學으로 하나 된 중원오히려 이방인보다는 중원 국가에서 유학儒學이 불교佛敎의 자리를 밀어내고 빠르게 자리잡았습니다. 연운 16주를 차지해 한족을 흡수한 요遼는 북방은 유학儒學을 받아들였으나 거란족까지 유학儒學이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요遼는 통치방법으로 거란족의 유목생활을, 남방은 한족의 정주생활을 분리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유목민족 특유의 정복 정신이 있었고, 불교佛敎에 심취한 국가였기에 유학儒學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대신 그 자리를 빠르게 차지한 금金은 빠르게 유학儒學을 받아들이고 과거科擧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며 걸출한 유학자를 배출했습니다. 금金도 동일하게 훈고학訓詁學을 받아들였지만 달달 외우기보다는 그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중기 때부터는 조병문 같은 명.. 2026. 9. 25. 이전 1 2 3 4 ··· 119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