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이 울창한 야생의 땅

고려高麗 때 경京과 목牧, 현縣은 모두 크고 작은 성곽으로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성곽을 쌓은 이유는 북방에서 침공하는 이민족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야생동물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걸 방어하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성곽 문을 벗어나면 큰 길 좌우로 햇빛도 안 들어오는 울창하고 빽빽한 숲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지요. 이 당시는 아무리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내 건물을 짓고 땔감으로 사용해도 도시의 인구가 적어 베어내지 못한 나무가 훨씬 많았기에 울창한 숲이 유지되었습니다.

때문에 고려高麗 때는 다른 도시나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어둑어둑한 숲 한가운데에 난 길을 따라 이동해야 했습니다. 이 자체로도 으스스한데 숲에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숲에 터를 잡고 거칠게 살며 지나가는 사람을 살해하고 재산을 빼앗는 산적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짐승들도 숲에 도사렸지요.

뿐만 아니라 인간의 완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각종 맹수들도 있었습니다. 호랑이와 표범은 물론 늑대와 승냥이 등 인간에게 위험한 동물들이 살았지요. 특히 승냥이는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다 한번 포착한 먹잇감은 죽을 때까지 쫒아가며 사냥하는 습성이 있어 길을 지나는 나그네를 자주 습격하는 위험한 동물이었습니다. 때문에 고려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나가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으며, 정 가야한다면 창과 활로 무장한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습니다. 귀족이 귀향歸鄕을 두려워한 이유 중 하나는 모든 기반을 몰수 당하고 비참히 몰락하는 것도 있지만, 고향으로 가는 과정에서 맹수의 습격을 받아도 병사들은 이미 역적인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을 것이기에 목숨이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 한 번 태어난 장소에서 쭉 산 고려 사람들

이런 실질적인 위험 때문에 고려 사람들은 태어난 장소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지방에서 개경開京으로 올라가는 것은 사병을 부릴 수 있는 유력 가문 출신의 사람이나, 배를 타고 이동하는 뱃사람이나 가능한 일이었지요.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백정은 태어난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간간히 외부에서 오는 조세원이나 상인을 제외하고는 일평생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았지요. 밖으로 나가면 죽음 밖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집이 모인 마을에 살아도 언제든 야생동물이 침입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밤에 호랑이나 표범, 늑대, 불곰 등 맹수들이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물어가던 시기였습니다. 지금도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작은 마을에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고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 외각에 높은 통나무로 목책을 쌓아 야생동물들이 뛰어넘지 못하게 막았고 망루를 설치해 밤마다 교대하며 순찰했습니다. 야생동물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북이나 꽹가리를 쳐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맹수가 당황해 도망가도록 만들었지요. 도시는 성곽과 병사가 이 역할을 하는데 작은 마을은 그게 없으니 마을 주민이 자급자족해야 했습니다.
- 비옥하지만 위험이 도사린 하천

지금의 모습으로 볼 때 신기한 점은 고려高麗 농사를 짓는 백정들은 비옥하고 넓은 강가 주변 평야 지대가 아닌 좁고 험한 산기슭에 모여 살았다는 점입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도 농민들이 굳이 산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작은 개울 여러 개가 모여 만들어진 큰 하천은 풍부한 무기질과 유기물이 가득한 토양이 충적된 비옥한 땅입니다. 고려 사람들도 이를 아주 잘 알았고요. 하지만 고려高麗 때 이 땅은 큰 물풀이 무성할 뿐 사람이 개간해 살지 못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장마철 홍수 범람 때문이었습니다. 한반도 기후 특성 상 여름 장마철에 집중 호우가 쏟아져 강물이 8배에서 10배 정도 불어났습니다. 허나 당시에는 도랑과 둑 등 제방시설이 발달하지 않아 여름철 홍수가 범람할 경우 꼼짝 없이 마을이 수몰당하고 수많은 백정이 익사했습니다. 민가는 물론 논밭에도 물이 들이닥쳐 벼와 작물이 썩어갔지요.

더 최악은 바다와 가까운 하천이었습니다. 저 멀리 상류 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홍수들이 모여 만든 대홍수를 직격으로 맞았을 뿐만 아니라 불어난 강물에 바닷물이 섞여 내륙으로 바닷물이 넘쳤습니다. 이를 염류화라 부르는데 홍수로 민물이 바닷물을 강하게 민 뒤, 민물 유입량이 줄면 그 반작용으로 바닷물이 육지로 밀고 올라가며 토양을 빠르게 염분화시켰습니다. 땅을 소금기가 가득한 땅으로 만들어 작물이 자라지 못하게 만들었지요. 때문에 가장 비옥하고 드넓은 평야가 있어 개간하기 좋아보이는 삼각주는 버려진 늪지대로 남았습니다. 한국의 낙동강 삼각주 뿐만 아니라 월남의 메콩강 삼각주, 중국의 장강 삼각주 모두 근대 이전에는 버려진 늪지대였습니다. 이집트의 삼각주가 워낙 예외적인 사례이지요.

첫번째 이유가 장마철 홍수라면 두번째 이유는 호랑이 때문이었습니다. 본디 호랑이는 키가 매우 큰 풀숲에서 은신하며 먹잇감을 기다리다가 단숨에 달려들어 사냥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高麗 때 큰 하천은 개간이 안되었기에 사람 키의 두 배는 되는 큰 풀들이 울창한 숲이었지요. 이는 곳 하천 일대는 호랑이 서석지였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되겠다고 하천으로 내려가는 건 자진해서 호랑이 밥이 되겠다는 소리였습니다.
- 상류가 흐르는 구릉지 일대에 모인 촌락

이런 위험 때문에 누구도 비옥한 하천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 힘을 들여 하천 일대를 개간하고 둑을 쌓아주지도 않았고 풀이 없는 겨울에 하천으로 내려가 땅을 개간하려 해도 며칠 뒤면 호랑이에게 물려갔습니다. 때문에 호랑이가 잘 출몰하지 않는 탁 트인 구릉지에 나무를 배어 없애고 경사면을 따라 땅을 깎아 계단식 논을 지어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고 험준한 곳에 마을을 짓고 목책을 세워 살았지요.

그리고 물을 많이 먹는 벼를 키우기 위해 산골짜기나 샘물이 흐르는 개천에서 물을 끌어다 사용했습니다. 이 때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직접 양동이로 물을 날라 논에 물을 줘야 했지요. 혹은 작은 개천 아래에 계단식 논을 짓고 낙수 효과로 물을 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계단식 논을 지으면 단위 면적 당 사용할 수 있는 논의 면적이 평지보다 더 좁아 농업 생산력이 낮았습니다. 또한 저 당시에는 비료가 인분 밖에 없었는데 애초에 사람이 잘 먹지 못하니 비료 질이 좋지 않아 한번 농사를 지으면 몇년을 쉬는 휴경지로 둬야 했습니다.

낮은 농업 생산력을 올려 부족함 없이 먹고 살려면 결국 휴경지까지 포함한 논이 많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겨울에 화전을 하며 논을 넓혀갔습니다. 문제는 농사를 짓고 살만한 구릉지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지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면 표범과 곰의 습격을 받았고 하천으로 밀고 가며 개간하면 호랑이에게 언제 물려갈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화전을 하더라도 늘릴 수 있는 농지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 어촌 사람들의 터전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주로 구릉지에 모여 살았다면 바다에서 모여 살던 어촌 사람들은 갯벌이나 만에 모여 살았습니다. 갯벌은 조수간만이 확실하게 일어나고 드넓은 갯벌이 해일 등 위험한 해상 재난을 막아줬기에 살기에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더불어 갯벌에만 가면 각종 조개와 게, 미역과 다시마 등 해초와 해산물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서해와 남해에 펼쳐진 갯벌 앞에 모여 살았습니다.

다만 이들은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 일은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고려高麗 때까지만 해도 어선이 작아 조금 큰 풍량을 만나기만 하면 전부 침몰해버리니 바다로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어업을 한다면 차라리 주변에 있는 하구로 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지, 먼 바다로 나가 큰 바닷고기를 잡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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