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혜의 요새이자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 남경南京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는 조선朝鮮 때 종로 일대가 한양漢陽으로 불리며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조선朝鮮 전 고려高麗 때도 경京으로 우대받는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종로부터 명동 일대에 해당하는 한양漢陽 위치를 보면 외부 침입을 막고 물을 얻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산이라는 큰 산이 북방에서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상태에서 북악산, 인왕산, 안산, 남산이라는 꽤 높은 산이 동쪽을 제외하고 모든 방면을 틀어막고 있지요.

심지어 뚫린 동남쪽에는 한강韓江이라는 큰 강이 흘러 강에서 막으면 적이 침입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평소에는 한강에 조운선이나 무역선이라는 큰 배를 띄워 내륙 지방과 서해 일대를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청계천淸溪川이 흘러 수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개경開京의 사천沙川보다 크고 물이 풍부해 살기 좋았습니다. 이는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최고의 명당이어서 고려高麗 때에도 대도시로 번성했습니다.

남경南京은 도시의 위치도 좋지만 한강韓江이 주는 지리적 이점은 매우 막강했습니다. 한강韓江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서 시작된 두 줄기의 강이 모여 흐르는 강이기에 한반도 중부 지방 도시 전체를 한강 하나로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운선을 보내 중부 지역 전체의 세금을 전부 걷어들이는 것만으로도 부를 축적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 고려高麗 도읍 후보로 거론된 남경南京

개경開京은 땅이 좁고 물이 적어 고려高麗 건국 후부터 계속 수도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보통 서경西京을 새로운 수도 후보로 많이 거론했는데, 그 외의 후보 중 하나가 남경南京이었습니다. 문종 때 처음으로 청계천부터 북악산에 이르는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키고 남경南京이 관할하는 구역을 한양부漢陽部로 지정했습니다. 그래서 남경南京은 한양부漢陽部에서 생산한 것을 흡수하며 빠르게 대도시로 발전했지요.

그리고 문종과 숙종은 남경南京에 별궁을 세우며 천도할 수도 후보로 개발했습니다. 숙종 때 남경궁궐南京宮闕 건축을 완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숙종이 직접 남경南京으로 행차해 정무를 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요전쟁 이후 일부 거란 사람들이 귀순해 남경南京에 모여 살았다고 하지요.

추후 [천자 황제天子 皇帝] 편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고려高麗 때 지어진 남경궁궐南京宮闕 위치가 지금의 청와대靑瓦臺부터 경복궁景福宮 후원後園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해당 위치에서 고려高麗 유적이 많이 나오고요. 일부는 경복궁景福宮 자체가 고려高麗 말에 새로 짓다 만 궁궐을 이어 지은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합니다.

특히 숙종 때면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남경천도설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김위제 등의 신하는 개경開京 땅의 기운이 쇠하였으니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속한 남경南京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숙종도 이에 호응해 남경南京으로 많이 행차에 남경궁궐南京宮闕에 자주 머물렀고요. 또한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으로 가는 길에 혜음원惠音院이나 각종 역驛을 설치해 교통망을 다듬었습니다.
- 서경西京 몰락의 수혜지 남경南京

이렇게 정성을 들여 남경南京을 신도시로 만들었음에도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천도하지 못한 이유는 서경西京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북벌을 위한 군사도시이자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하는 고려高麗 정체성, 더불어 대동강大同江이 마련한 넓은 평야와 풍족한 물은 누가봐도 새로운 수도이자 대도시로 적합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수도 후보는 언제나 서경西京이었지요. 그러나 이 서경西京은 묘청의 난으로 자멸했습니다.

허나 당장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천도하자는 움직임을 내기는 어려웠습니다. 경京에서 반란이 일어나 조정에서 경京의 지위를 대폭 하락시켰고 수도 천도라는 말 자체가 꺼내면 안되는 금기어로 여겨졌지요. 대신 남경南京 도시에 각종 시설을 추가하며 서경西京보더 더 뛰어난 도시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급 무신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이들의 불만이 쌓이다 못해 무신정변이라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 몽골이 파괴한 폐허에 건 마지막 희망

고려高麗를 침공한 몽골은 강도江都에 숨은 황제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전역을 불태우고 초토화시켰습니다. 개경開京에서 가까운 번성한 도시 남경南京도 몽골의 파괴 대상이 되었지요. 이후 황제가 몽골에 항복한 이후에도 남경南京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려高麗 조정은 좁아터진 개경開京 대신 남경南京을 새 도읍지로 여겨 무너진 도시를 재건했지요.

몽골지배기라는 평화 안에 남경南京이 어느정도 재건되자, 공양왕은 남경南京으로 잠깐 천도했다가 여론에 밀려 다시 개경開京으로 되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남경南京은 고려高麗 때 끝내 수도가 되지 못했지요. 그러나 고려高麗가 멸망하고 정도전과 이성계가 건국한 새 나라 조선朝鮮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땅인 남경南京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도시 이름을 한양漢陽으로 짓고 경복궁景福宮을 지으며 새로운 수도로 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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