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려高麗/의식주衣食住

[의식주衣食住 : 도시와 촌락] 귀족들의 사유지 장원莊園

by 롱카이 2026. 7. 30.
반응형

  • 국가 재정 부족과 장원莊園
삼한일통을 위한 전쟁은 패서호족 재력을 상당히 소모시켰다
삼한일통을 위한 전쟁은 패서호족 재력을 상당히 소모시켰다

고려高麗는 개성開城 일대의 패서호족이 다른 호족들과 연합해 세운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태조 왕건은 삼한일통三韓一通 과정에서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혼인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재산을 선물로 주는 등의 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중국과 무역하며 막강한 부를 쌓은 패서호족이다하더라도 다른 호족과 연합하고 견훤에 맞써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재산을 상실했습니다.

삼한을 손에 넣었는데 정작 돈이 없다
삼한을 손에 넣었는데 정작 돈이 없다

그렇게 패서호족이 재산을 깎아가며 삼한일통三韓一通을 한 뒤에는 남은 재산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태조 왕건은 전국에서 민란이 또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세금을 기존의 1/10로 줄이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백정들이 땅으로 되돌아가 농사를 짓고 살게 하기에는 좋았지만, 가뜩이나 전쟁으로 비어간 국고를 채우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결국 막 등장한 고려高麗의 국고는 텅텅 비어있는 상태로, 개국공신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할 수 없는 어이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중세 유럽과 동일하게 돈이 없으니 세금을 거둘 장원 자체를 귀족에게 줬다
고려는 중세 유럽과 동일하게 돈이 없으니 세금을 거둘 장원 자체를 귀족에게 줬다

그렇다고 개국공신에게 아무 보상도 하지 않으면 이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 뻔했지요. 그래서 태조 왕건은 개국공신에게 보상금을 직접 지불하는 대신 이들에게 일정 토지를 주고, 그 토지에서 걷어들인 세금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땅을 장원莊園이라 부릅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모든 행정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에서 시작된 중세 유럽에서 황제가 귀족들에게 장원을 나눠준 것과 동일했습니다.
 
 
 

  • 귀족 경제력의 바탕
귀족은 논밭과 산을 장원으로 얻어 재산을 쌓았다
귀족은 논밭과 산을 장원으로 얻어 재산을 쌓았다

건국 직후부터 장원莊園을 보상으로 나눠주니 고려高麗에서 귀족이나 신하에게 주는 최고의 하사품은 장원莊園이었습니다. 건국 직후 왕건에 협조했던 호족들은 보상으로 본인 관할의 땅은 물론 남은 여분의 땅도 장원莊園으로 얻었습니다. 이 땅은 세습되어 후손에게 그대로 전해졌지요. 거기에 공을 세우면 공음전功蔭田이라는 이름으로 땅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권세가들은 황제가 보고 있는데도 무시하고 권력으로 찍어눌러 불법적으로 장원莊園을 넓히기도 했지요. 이렇게 얻은 장원莊園은 논밭과 산으로 논밭에서는 쌀을 비롯한 각종 식량을 세금으로 받고 산에서는 숯을 받았습니다. 즉, 장원莊園은 지금의 사유지 개념과 동일하지요.

소작농과 외거 노비가 장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귀족에게 세금을 납세했다
소작농과 외거 노비가 장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귀족에게 세금을 납세했다

귀족들은 장원莊園을 경영할 관리인으로 마름이나 가신을 모집해 구역을 나눠 각자 관리하게 했습니다. 그럼 마름과 가신은 귀족의 외거 노비를 장원莊園의 논밭으로 보내 농사를 짓고 수확물의 일부를 걷어갔지요. 이건 국가에서 허용한 장원莊園 운영의 모습인데 실제 귀족은 더 욕심을 내 권력으로 백정들의 토지를 몰수한 뒤, 그들을 강제로 소작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 졸지에 소작농이 된 이들은 서류 상으로는 백정의 토양이니 국가에 세금을 내고, 추가로 귀족의 협박에 못 이겨 귀족에게도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중 과세, 그것도 하나는 불법인 세금을 내야 했지요.

귀족은 사적 조운선을 보유해 장원의 재산을 수거해갔다
귀족은 사적 조운선을 보유해 장원의 재산을 수거해갔다

심지어 귀족들은 독자적인 조운선을 보유해 사적으로 세금을 걷어갔습니다. 그래서 서해 바다나 한강, 대동강, 금강 등 큰 강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며 국세를 걷어가는 조운선과 귀족이 장원莊園에서 걷어가는 재산을 운반하는 조운선들이 떠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귀족 경제력의 바탕은 장원에서 나왔다

그래서 귀족은 개경開京에 있는 본인 대저택에 머물면서 장원莊園을 통해 꼬박꼬박 재산을 축적해갔지요. 지방에 있는 장원莊園에서 걷힌 세금은 곧바로 귀족 대저택에 쌓여갔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들이 특정 기업의 주주가 되어 배당금을 꼬박꼬박 받아가며 부를 축적하듯이 고려高麗 때는 장원莊園으로 재산을 굴려갔습니다.
 
 
 

  • 나라가 휘청일 정도로 거대해진 장원莊園
무력이 곧 힘이었던 무신정권은 불법적인 장원 확장이 극에 달했다
무력이 곧 힘이었던 무신정권은 불법적인 장원 확장이 극에 달했다

이런 현상은 군사력이 곧 권력이 된 무신정권과 권문세족 때 극에 달했습니다. 황제보다 더 높은 권력을 가진 무신은 황제와 법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장원莊園을 확장했습니다. 그 가운데에 저항하는 자들은 사병을 보내 진압해가며 무식하게 넓혀갔지요. 명분은 경쟁하는 무신 가문보다 더 많은 재산을 얻어 정권을 지킨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신정권 이후의 정권인 권문세족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불법적으로 장원莊園을 확장했지요.

기록에 따르면 산과 계곡을 경계로 장원을 나눠 가질 정도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산과 계곡을 경계로 장원을 나눠 가질 정도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무신정권 말기에는 산 하나와 계곡 하나가 개인의 장원莊園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세와 계곡을 경계로 각자 땅을 장원莊園으로 나눠 가지는 일이 빈번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만큼 국가 소유의 땅이나 백정 소유의 땅이 줄어 국가에서 세금을 걷어갈 땅이 줄었습니다. 이는 곧 국가 재정이 약화되는 것으로 갔지요. 그래서 고려高麗 말이면 홍건적과 왜구가 날뛰는데 군대를 출병시키기는 커녕 유지할 비용조차 내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 섬을 사냥터로 활용하다
드넓은 섬은 사냥터로 개발해 사냥을 즐겼다
드넓은 섬은 사냥터로 개발해 사냥을 즐겼다

귀족들은 논밭과 산이 있는 장원莊園을 주로 얻어 자기 가문만의 경제력 기반을 쌓아갔는데, 이미 넉넉한 장원莊園이 있는 귀족은 섬을 추가로 얻기를 원했습니다. 적당히 평지가 있고 숲이 있는 섬을 원했지요. 그 이유는 섬을 사냥터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호랑이와 표범, 승냥이 같은 맹수가 없는 안전한 섬에 사슴과 멧돼지, 토끼, 여우 등을 풀어놓고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유희를 즐기려고 섬을 얻으려 한 것이죠. 그래서 심심하면 부하들을 이끌고 사냥개를 섬에 풀어 사냥감이 나타나게 한 뒤 활로 쏴 사냥하며 즐거워했습니다.

매사냥은 귀족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매사냥은 귀족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특히 길들여진 매를 풀어 토끼같은 작은 육지동물이나 꿩, 오리, 기러기 등 새를 잡는 매사냥을 즐겼습니다. 꿩이나 오리 같은 지상에 주로 사는 새들은 먼 바다를 건너지 못했기에 육지에서 잡아 섬에 풀어 키우며 종종 매사냥을 했지요. 지금은 여유가 많은 부자들이 골프장에서 골프와 각종 액티비티를 즐긴다면, 고려高麗 때는 사냥이라는 유희를 즐겼습니다.
 
 
 

  • 장원莊園을 몰수하고 본관으로 내쫒은 귀향歸鄕
귀향은 귀족의 재산과 기반을 전부 몰수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방 본관으로 추방하는 형벌이었다
귀향은 귀족의 재산과 기반을 전부 몰수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방 본관으로 추방하는 형벌이었다

그렇다고 귀족이 평생 누구의 눈치도 안보고 장원莊園을 끼고 호의호식할 수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황제에게도 귀족을 단숨에 몰락시킬 강한 카드가 있었지요. 그것이 귀향歸鄕입니다. 귀향歸鄕은 귀족이 반역 등 큰 죄를 지으면, 장원莊園과 개경開京의 저택은 물론 각종 권한을 전부 몰수한 뒤 고향에 있는 본관으로 보내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는 물론 후손도 영원히 개경開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접근 금지령을 내리고 정계 진출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모든 재산과 기반을 싹 다 회수한 뒤 지방에 딱 하나 남은 집으로 쫒아버려 대대로 초라하게 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지요. 현재는 물론 미래에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뿌리 뽑은 사형 선고였습니다.

귀향 당한 귀족은 모든 것을 잃고 본관 집에서 서서히 몰락했다
귀향 당한 귀족은 모든 것을 잃고 본관 집에서 서서히 몰락했다

일례로 문종 때 배행은 불법으로 황명을 위조해 관직을 주변에 나눠주다 들켜 파주로 귀향歸鄕당했고,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주도한 척준경은 곡주로 귀향형歸鄕刑을 당했습니다. 이 때 귀족이 가진 사병도 당연히 전부 몰수해 황제 직속 고려군으로 편제했고, 귀족은 고려군의 삼엄한 감시 하에 홀몸으로 걸어서 고향에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의 본관에서도 사방에 고려군이 감시하고 있었지요. 당장은 그래도 본관에 있는 기와집에서 살만했지만,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기에 재산은 고갈되고 도우러 오는 사람도 없었기에 서서히 비참하게 몰락했습니다. 그래서 귀족은 귀향歸鄕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무신정권 당시 무신은 귀향을 당해도 대놓고 사병을 데리고 가 지방 군벌로 군림했다
무신정권 당시 무신은 귀향을 당해도 대놓고 사병을 데리고 가 지방 군벌로 군림했다

물론 황제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는 무신정권 때면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무신정권 때는 귀향歸鄕을 당해도 본인 사병을 당당하게 동원해 고향에 내려간 뒤, 그곳에서 지방 군벌로 군림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몇 달 정도 고향에 있다 다시 개경開京으로 되돌아오며 퍼포먼스에 불과했지요. 오히려 지방 본거지에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며 지방의 충성심을 얻고 오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 고려高麗와 일본日本 장원莊園의 차이점
고려와 일본 모두 귀족은 수도에서 편히 살고 가신이 지방의 장원을 관리하며 귀족에게 세금을 바치는 구조였다
고려와 일본 모두 귀족은 수도에서 편히 살고 가신이 지방의 장원을 관리하며 귀족에게 세금을 바치는 구조였다

고려高麗의 장원莊園 제도를 보면 일본日本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히 귀족은 수도에 지은 대저택에서 편안하게 살고, 가신이 장원莊園을 관리하며 먼 지역에 있는 귀족에게 세금을 꼬박 바치는 점은 고려高麗와 일본日本이 동일합니다. 고려高麗는 귀족이 개경開京에 머물렀고, 일본日本 귀족은 헤이안쿄平安京에서 정원을 이루고 살고 있었지요. 그럼 여기서 의문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시스템을 보면 장원莊園을 실제로 관리하는 가신이 주인을 배신하고 장원莊園을 홀라당 먹을 수도 있지요.

일본 센고쿠 시대는 가신이 귀족을 배신하고 장원을 차지하며 벌어졌다
일본 센고쿠 시대는 가신이 귀족을 배신하고 장원을 차지하며 벌어졌다

그리고 그게 가능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전국시대, 일본식 발음으로는 센고쿠 지다이戰國時代라 불린 시기가 등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지방의 가신들 역할을 한 사무라이들이 중앙의 귀족을 배신하고 장원莊園의 통치자인 다이묘大名가 되어 본인 땅을 확보하고, 재산을 불리기 위해 경쟁자의 영토에 침공하며 끝없는 전쟁을 했지요.

고려 귀족과 무신은 사병을 양성해 장원 반란을 모두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고려 귀족과 무신은 사병을 양성해 장원 반란을 모두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헌데 고려高麗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럴 시도 조차 없었지요. 그 이유는 귀족이 가신보다 군사력이 더 뛰어나 가신이 하극상을 벌여도 언제든 진압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반란 때마다 항상 중앙 귀족이 이겼기 때문입니다. 개경開京에 살던 귀족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장원莊園의 반란에 대비해 사병을 양성했고, 반란 때마다 성공적으로 진압했지요. 특히 무신정권 때 폭정에 반발한 장원莊園의 소작농이 민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모두 진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등 더 큰 규모의 반란도 척척 진압하니 일개 장원莊園이 감히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지요.

일본은 오닌의 난으로 중앙 귀족의 군사력이 약해져 지방 장원의 무장 봉기를 진압하는데 실패했다

일본日本도 한동안은 고려高麗처럼 귀족의 군사력이 강해 장원莊園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헤이안平安 시기부터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때까지 헤이안쿄平安京의 귀족과 중앙 사무라이 중심 사회였지요.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말기에 일어난 쇼군将軍 자리를 두고 귀족들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살육하며 군사력을 크게 소모시킨 오닌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때문에 난 이후 귀족과 중앙 사무라이 군사력은 매우 약해졌고 이를 기회로 본 장원莊園 관리를 담당한 지방 사무라이들이 스스로 다이묘大名 자리에 올라 중앙 군대를 격퇴해 내쫒고는 지방 영토를 차지했지요. 순식간에 사병과 장원莊園을 잃은 귀족과 중앙 사무라이는 헤이안쿄平安京에서 몰락해 사라지고 지방의 다이묘大名를 중심으로 사회가 재편되었지요. 때문에 지금 한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사회인데 일본은 각 지방 도시별로 특색이 강한 지방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닌의 난 하나가 한국과 일본 사회의 차이점을 만들어낸 셈이지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