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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식주衣食住

[의식주衣食住 : 도시와 촌락] 지방 속현屬縣을 다스린 향리鄕吏

by 롱카이 2026.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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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현主縣 지방관 아래에 속한 속현屬縣 향리鄕吏

수많은 호족 중 중소 호족은 대부분 지방에 남았다
수많은 호족 중 중소 호족은 대부분 지방에 남았다

고려高麗 건국 직후 큰 공을 세운 호족들은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고 개경開京에 가 호의호식했습니다. 하지만 삼한일통三韓一通 과정에서 모두가 왕건의 편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견훤 쪽 사람도 아닌 일개 중소 호족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 호족들은 고려高麗가 건국된 후에도 자기 거점이던 지방에 남았으며, 황제도 이들을 딱히 간섭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려의 주현(왼쪽)과 주현 산하 속현(오른쪽 노란색) [출처: 지도러]
고려의 주현(왼쪽)과 주현 산하 속현(오른쪽 노란색) [출처: 지도러]

대신에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당근을 줬는데 이들에게 향리鄕吏 관직을 주고 자기 지방 거점을 속현屬縣이라는 행정구역으로 인정해 관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향리鄕吏를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방을 주현主縣으로 나눈 뒤, 그 산하에 속현屬縣을 배치해 향리鄕吏를 조정에서 관리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향리鄕吏는 주현主縣을 다스리는 지방관에게 보고를 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지요.

 

 

 

  • 대장원大莊園 대신 외역전外役田을 받은 향리鄕吏

향리는 외역전이라는 이름으로 본인 가문의 토지를 국가로부터 공인받았다
향리는 외역전이라는 이름으로 본인 가문의 토지를 국가로부터 공인받았다

개경開京이나 서경西京, 동경東京 등에 머물던 귀족은 거대한 장원莊園을 소유하고 납세의 의무도 지지 않아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방 향리鄕吏는 지방관에게 성실히 세금을 납세해야 하고 자기가 거느린 토지도 장원莊園만큼 크고 비옥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삶이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중앙은 향리鄕吏가 지방을 통치하는 대가로 외역전外役田이라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인정하고 보장했습니다. 장원莊園처럼 크고 비옥한 편은 아니지만 자기 속현屬縣의 땅을 외역전外役田이라는 이름으로 행정 처리되어 보장받았지요. 당연히 이 땅은 세습이 가능해 향리鄕吏 경제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향리는 국유지에서 땔감을 가져갈 큰 권한을 가졌다
향리는 국유지에서 땔감을 가져갈 큰 권한을 가졌다

이는 큰 보장이었습니다. 서류 상으로는 국가의 토지이기 때문에 귀족이 장원莊園을 넓히겠다며 함부로 뺏기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엄연한 국가의 공무원이었기에 필요하다면 다른 국가 소유 토지와 임야를 잠깐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가 소유한 산에서 땔감을 채취할 권리를 가졌지요. 본인 외역전外役田에 산이 없어도 필요하면 땔감을 가져와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 사용만 허용될 뿐, 이를 판매하는 상업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 향리鄕吏

향리는 자기 속현 안에서 도시 개발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향리는 자기 속현 안에서 도시 개발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지방관이 감시한다 해도 자기 속현屬縣에서는 향리鄕吏가 모든 권한을 쥔 권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속현屬縣을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고 건물이나 사찰을 짓는다며 자기 속현屬縣 사람들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향리鄕吏가 가진 권한으로 지방관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저수지를 만드는 것은 향리鄕吏가 지방관에 보고만 한다면 마음껏 할 수 있었고, 국가는 세율 증가라는 이익을 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물론 몰래 하는 건 안되었지요. 그리고 사찰을 으리으리하게 짓는 것도 별다른 간섭이나 제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향리는 본인 저택을 화려하게 짓는데 속현 사람을 징발해도 문제 없었다
향리는 본인 저택을 화려하게 짓는데 속현 사람을 징발해도 문제 없었다

심지어 향리鄕吏는 본인 저택을 크고 웅장하게 짓기 위해 속현 사람들에게 강제 노역을 하게 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세금 같은 경우도 법적으로는 향리鄕吏는 국가에서 정한 세금을 속현屬縣에서 거둬 주현主縣 지방관에게 납세해야 했습니다. 그 이상을 무단으로 걷어들이면 처벌을 받았지요. 하지만 세금을 보관하는 비용과 주현主縣으로 운송하는데 드는 비용 등을 고려해 일부 비용을 추가로 걷어가 사용하는 걸 허용했습니다. 향리鄕吏는 이 허점을 발견하고 더 많은 세금을 거둬 남은 마진을 본인 재산 불리는데 사용했지요. 중앙은 이를 알고도 대부분 침묵했고요. 그래서 폭정을 일삼는 향리鄕吏가 있는 속현屬縣 주민은 향리鄕吏에게 더 높은 세금을 뜯기고 여기저기에 강제 노역되어 고된 삶을 살았습니다.

 

 

 

  • 향리鄕吏 간 빈부격차

부산, 인천 등 큰 항구와 넓은 땅을 가진 속현의 향리는 부유했다
부산, 인천 등 큰 항구와 넓은 땅을 가진 속현의 향리는 부유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향리鄕吏가 받은 외역전外役田이 어떤 곳이냐에 따라 향리鄕吏끼리도 빈부격차가 극심했습니다. 부유했던 향리鄕吏는 대부분 대전과 대구 등 넓고 비옥한 토양을 가져 막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부를 쌓거나 부산과 인천 같이 항구로서 무역하며 상업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번성한 속현의 향리는 궁궐 같은 대저택에서 살았다
번성한 속현의 향리는 궁궐 같은 대저택에서 살았다

이런 지역을 대를 이어가며 관리한 향리鄕吏는 그만큼 부와 명예를 가졌습니다. 본인 집은 궁궐이나 개경開京의 권세가도 부럽지 않은 저택으로 지어 떵떵거리며 살았지요. 국가의 공식적인 정무는 나라에서 마련한 현사縣司라는 공공기관에서 수행했지만, 무역상과의 만남이라던가 고을의 승려와의 업무 약속 등 비공식적인 업무는 본인 대저택에서 수행했습니다. 반역으로 여겨질만한 선을 넘지 않으며 사실상 지방의 왕으로 군림했지요.

작은 고을을 통치한 향리는 권한과 권력도 작았다
작은 고을을 통치한 향리는 권한과 권력도 작았다

반면 태백산맥 자락 등 척박한 땅의 향리鄕吏는 실질적 권한도 없고 주민도 별로 없어 동네 이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동네를 관리하는 수준에서 머물렀지요. 저택은 커녕 초가집이면 다행인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이는 반역 행위였기 때문에 꼼짝없이 작고 초라한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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