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의 침입과 강도江都 천도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대칸에 오른 이후, 몽골은 전세계 유통망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 전세계를 침공했습니다. 특히 막대한 부를 가진 남송南宋의 자원을 노리고 침공했는데, 이 때 남송南宋의 우호국들은 전부 점령해 남송南宋을 고립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대상 중 하나가 고려高麗였지요. 그래서 몽골은 고려高麗를 침공했는데 이 때 무신정권은 직접 대항하기보다는 재빨리 피신해 세력을 보존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무신정권이 선택한 곳은 개경開京에서 가까운 섬인 강도江都였습니다. 이 때 강도江都는 간척 전으로 험준한 산세가 바다 위로 솟아오른 섬으로 평지가 부족했습니다. 허나 급박한 상황이어서 무신은 황제와 황실은 물론 개경開京의 귀족과 백정 모두 강도江都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렇게 강도江都는 순식간에 임시 수도로 부상했습니다.
- 개경開京을 그대로 모방한 강도江都

문제는 개경開京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강도江都가 좁고 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신은 강도 해안가 갯벌에 방조제를 쌓고 돌과 모래를 부어 급하게 간척했습니다. 당연히 이 대규모 토목공사에는 백정들을 대규모로 징발해 진행했고요. 그래서 급히 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할 농지를 만들며 몽골의 포위에도 몇년을 버틸 장소로 바꿨습니다.

급한 간척을 해결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황제와 무신, 귀족이 살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내륙과 가까운 동해안 일대에는 외성外城을 쌓아 몽골군의 상륙에 대비하고 중성中城과 산성山城을 쌓아 몽골군 침공이나 민란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산성山城 안에 궁궐을 짓고 무신과 귀족들의 저택을 지으며 제2의 개경開京으로 만들어갔지요.

가장 중요한 식수도 확보할 길이 있었습니다. 오련산五蓮山(현재 지명: 고려산)에서 흐르는 수많은 하천이 섬 전체로 퍼졌으며 산이 품은 지하수도 풍부했습니다. 오히려 식수는 개경開京보다 더 풍부해 농업 생산력과 인구 수용력이 더 높았지요. 그래서 고려高麗 때 강도江都에서 농사를 지을 평지는 서쪽 간척지에 한정되었지만 농업 생산력은 그리 낮아지지 않아 버틸만했습니다.

물론 몽골도 가만히 구경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신정권이 강도江都에 틀어박힌 체 조운선을 통해 여러 강으로 내륙에 들어가 세금을 걷어가자 세금 유통망을 끊어 고립시키기 위해 도시들을 무차별로 불태우고 약탈해갔습니다. 즉 침공한 쪽에서 역으로 청야작전을 벌여 강도江都에 숨은 무신정권을 말려 죽이려고 한 것이죠. 이에 대항해 무신정권은 간척지에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살아남은 내륙 도시에 더 강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응전했습니다. 이렇게 어찌저찌 쌓은 부로 강도江都에 화려한 저택과 사찰을 지으며 작은 개경開京으로 만들어갔습니다.
- 착취로 얻은 부를 바탕으로 개경開京을 모방한 강도江都

내륙에서 어떻게든 쥐어짜 얻어낸 부를 바탕으로 무신정권은 수도의 위엄이 살게 해야 한다며 강도江都를 개발했습니다. 중성中城 안쪽을 무신과 귀족이 사는 구역으로 정해 개경開京처럼 만들기에 들어섰지요. 궁궐과 사찰은 개경開京에 있던 것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가 쓰며 새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미 강도江都에 존재한 사찰은 허물고 더 크게 지었으며, 무신과 귀족은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기 위해 새로운 사찰을 경쟁적으로 건립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선원사禪源寺는 무신정권을 이끌던 최우가 후원해 지어진 사찰이죠. 그 외에도 최우는 개경開京에 있던 것보다 더 크고 화려한 저택을 짓고 격구장을 만들어 격구를 즐기거나 연등회, 팔관회를 저택에서 열고 무희와 악사를 몇백 명 수용해 화려하게 잔치를 즐겼다고 합니다.

비단 무신정권을 이끌던 최씨 가문 뿐만 아니라 중간 계급의 무신과 귀족들도 화려한 사치에 가담했습니다. 몽골군이 강도江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내륙을 몽골 땅으로 만들지 않는 것을 본 이들은 마음놓고 백정을 착취하며 강도江都를 더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궁궐과 사찰, 그리고 저택을 금칠하고 거의 매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불교 행사를 하며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었지요.

이런 사치는 내륙 사람들의 눈물과 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내륙 사람들도 반발했지요. 개경開京에서는 버려진 하급 관리와 가난한 백정들이 가혹한 세금에 분노해 이통의 난을 일으켰으나, 무신정권에게 진압되고 되려 남아있던 건축물이나 자재들을 강도江都로 옮긴다는 명분 하에 다 빼앗겼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무신정권에게 세금을 바치느니 차라리 그걸 몽골군에게 준다며 투항하고 몽골에게 세금을 바치다 무신정권에게 들켜 방화와 학살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백정들은 몽골군보다 무신정권에 더 나쁘다며 증오했지요. 보다 못한 관덕장군이 강도江都에서 군사 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전복하려고 했지만 이마저 실패로 돌아가며 무신의 폭정을 막지 못했습니다.
- 개경開京 환도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강도江都

무신정권은 강도江都에서 무려 39년을 버텼습니다. 거의 반세기를 버틴 것이지요. 하지만 고종이 몽골에게 투항하고 개경開京으로 돌아가자 무신정권은 이에 반발해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고종은 황제를 따르는 고려군과 몽골군 연합군을 결성해 강도江都로 상륙해 삼별초를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 명령에 따라 강도江都의 건축물을 모두 허물고 개경開京으로 옮겨 다시 세웠지요.

때문에 개경開京 환도 이후 강도江都는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화려했던 궁궐과 사찰, 저택은 기단석까지 모두 뜯어져 개경開京으로 옮겨가고 초목만이 남았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강화도江華島에 가도 고려高麗의 흔적을 못 찾는 것입니다. 조선朝鮮 건국 직후 유학자들이 고려高麗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지만 못 찾고 그냥 그 위에 조선朝鮮 건축물을 세웠을 정도였으니 말이죠.

그래도 지금 사학계에서 첨단 기술을 활용해 마을 곳곳에 숨어 잠들어 있는 고려高麗 유적지를 찾아 발굴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만, 언젠가는 풍부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강도江都에 잠들어 있던 옛 고려高麗의 모습을 찾아내 복원할 수 있겠지요.
'고려高麗 > 의식주衣食住'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의식주衣食住 : 도시와 촌락] 귀족들의 사유지 장원莊園 (19) | 2026.07.30 |
|---|---|
| [의식주衣食住 : 도시와 촌락] 마지막 희망 남경南京 (14) | 2026.07.29 |
| [의식주衣食住 : 도시와 촌락] 신라의 영광을 유지한 동경 東京 (13) | 2026.07.27 |
| [의식주衣食住 : 도시와 촌락] 고구려의 기상을 가진 제2도시 서경西京 (26) | 2026.07.24 |
| [의식주衣食住 : 도시와 촌락] 중심지 개경開京 모습 (17) | 2026.07.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