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高麗가 흡수한 신라新羅와 동경東京

후삼국시대 때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後百濟에 대항해 신라新羅에 유화정책을 피며 서서히 흡수해갔습니다. 이에 수도 서라벌을 제외한 모든 구역을 견훤에게 빼앗긴 신라의 왕은 왕건에게 투항하며 피를 흘리지 않고 고려高麗에 흡수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왕건은 견훤이 서라벌에 다시는 입성하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방어해 도시를 지켜냈고요.

덕분에 신라新羅의 수도 서라벌은 신라新羅 멸망 후에도 찬란한 영광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라新羅를 주름잡던 귀족들은 고려高麗 때도 강력한 호족으로 인정받아 지위를 누렸으며 도시는 파괴되지 않고 옛날의 번성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후삼국시대 때 대부분의 도시가 불타버리고 파괴된 것과는 대비된 모습이었지요.
- 영남의 대도시로 누린 동경東京

태조 왕건은 서라벌을 동경東京으로 부르며 옛 수도의 지위를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소백산맥 안 영남 지역 전체를 동경東京에서 독자적으로 관할하도록 특혜를 주었지요. 서경西京이 북계北界 전체를 관할했다면, 동경東京은 영남 전체를 영향권에 뒀습니다. 일단 동경東京은 신라新羅 때부터 대규모 도시 계획을 세우고 지어졌기에 인프라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동경東京 인근에 흐르는 형산강兄山江이 만든 비옥한 토양에서 얻은 곡물과 신라新羅 출신 호족들이나 사찰이 가진 가진 막대한 토지와 재산이 그대로 유지되었지요. 거기에 신라新羅 시기 때 국제 무역항 역할을 한 울산항에 대한 통제권도 쭉 이어져 동경東京은 고려高麗에서 매우 부유한 도시로 소문이 났습니다.
- 유학자 인재를 배출한 동경東京

하지만 아무리 부유함을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동경東京은 결국 고려高麗 중심지인 개경開京에서 지리적으로 멀었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고 중앙의 허용 하에 지역 패권을 유지할지 보증할 수 없는 상태였지요. 그래서 개경開京과 가까워질 방법을 강구했고 그 방법으로 유학자를 배출해 개경開京의 두뇌가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향교鄕校를 설치해 자제들을 가르치고 유학자로 양성했지요.

덕분에 고려高麗 중기 때부터 조정에 동경東京 출신 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경주 최씨와 경주 김씨 가문이 있었지요. 서경西京에서는 무신이, 동경東京에서는 문신이 배출되었지요. 서경西京 무신과 동경東京 문신 간 갈등은 묘청의 난 진압 이후로 서경西京이 역적의 도시로 낙인찍히며 본격적으로 첨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후에 일어나는 무신정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지요. 무신정변의 주 목적은 무신의 권리 향상을 주장하는 거였는데 그 과정에서 동경東京 출신 문신에 대한 증오도 같이 터진 겁니다.
- 서경西京 격하가 불러온 나비효과

아이러니하게도 경쟁 도시인 서경西京의 몰락은 동경東京의 격하도 불러 일으켰습니다. 서경西京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 때문에 고려高麗 조정은 경京에게 주어진 권한을 재검토했습니다. 그리고 논의 끝에 지방에 강한 권력을 주는 3경 체제가 반란의 빌미를 준다고 판단해 경京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각종 제도를 뜯어고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경東京은 경京에서 탈락하고 경주목慶州牧으로 격하당했습니다. 이는 개경開京에서 너무 멀어 반란이 일어나면 손을 쓰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대신에 지금의 서울에 남경南京이 새로 세워졌지요. 그럼에도 경주목慶州牧은 이미 부를 축적할 유통망이 잘 갖춰져 있어 이름만 강등될 뿐 생활 수준은 유지되었습니다.

문제는 서경西京 출신 무신들이 얼떨결에 권력을 잡은 무신정권 시기에 벌어졌습니다. 무신의 극심한 수탈로 백정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하면서 경주목慶州牧의 유통망 도시와 운송로도 비어갔습니다. 그리고 백정들은 순식간에 도적이 되어 경주목慶州牧 유통망을 습격하고 약탈했지요. 이 도적은 세력을 모아 김사미·효심의 난을 일으켜 신라부흥운동을 벌였습니다. 무신은 이를 잔혹하게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안그래도 파괴되고 있던 유통망은 물론 농지와 산업 인프라가 속절없이 불타버렸지요.
- 몽골 침입으로 명을 다한 경주목慶州牧

무신정권의 여파로 쇠락하는 경주목慶州牧을 나락으로 보낸 사건이 이어 발생했습니다. 바로 몽골의 침입입니다. 남송南宋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국가는 모두 멸망시키는 전략을 채택한 몽골은 고려高麗를 침공해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허나 황제가 강도江都로 도망가 내륙에서 걷어들인 세금으로 연명하자 이를 차단하고자 내륙 도시를 불태우고 유린하며 초토화시켰습니다. 그 피해를 가장 심하게 받은 곳이 경주목慶州牧이고요. 잘 아시다시피 몽골군은 경주목慶州牧을 침공해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도시의 건축물을 전부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해갔습니다.

때문에 천년 간 찬란한 금빛으로 가득 찼던 도시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지요. 시간이 지나 도시는 초목이 무성한 황야가 되었고, 몽골지배기 때부터 다시 도시 재건에 들어섰지만, 남경南京이라는 더 중요한 도시에 밀려 국가 주도의 재개발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 와중에 왜구가 고려高麗를 침공할 때 쓰시마対馬島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왜구가 자주 약탈하고 방화하며 기껏 재건된 것도 전부 사라졌고요.

혼란스러운 난세를 겪은 이후 조선朝鮮이 건국되며 안정을 되찾은 경주慶州는 다시 한번 유학자 가문을 대거 배출하긴 했지만 예전 신라新羅 때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했지요. 그저 경상도慶尙道의 좀 큰 도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건 지금도 그렇고요. 이렇게 천년 동안 한반도를 수호한 도시의 영광은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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