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란의 시기 군사 도시에서 시작한 개경開京

신라新羅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민중과 호족이 들고 일어난 후삼국시대는 전국 각지에서 봉기와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민중은 사찰과 관아 등 정부 기관을 불태우고 정부 인사들을 체포하며 저항했으며, 호족들은 민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도시를 침공해 불태우거나 복속시켰습니다. 이 전란의 시기에 권력을 잡은 왕건은 자신의 집이 있는 개성開城을 지배하며 민란이 일어나지 않게 관리하며 중국과 무역하며 부를 쌓았습니다.

모든 도시들이 초토화되고 경제가 무너지는 와중에 왕건의 개성開城이 멀쩡한 걸 넘어 부를 축적할 수 있던 것은 높고 험준한 송악산이 도시를 감싸 방어하는 분지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도시 안에 들어가는 길이 험하기에 성벽까지 쌓으면 웬만해서는 점령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요. 왕건을 복속시킨 궁예도 사실상 동맹 수준으로 관계를 맺을 정도면 개성開城 도시의 이점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됩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의 최후의 승자인 왕건은 자신의 고향을 개경開京이라는 수도로 승격시켰지요.
- 개경開京의 지리

왕건이 터를 잡은 개경開京이 어떤 곳인지 지리부터 보겠습니다. 북쪽에서 시작한 송악산이 동쪽을 제외하고 모든 곳을 감싼 분지 형태이지요. 그리고 송악산 북쪽으로 예성강이 흐릅니다. 이는 북방에서 침공할 경우 예성강을 넘고 가장 험준한 송악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매우 힘든 길이지요. 그리고 뚫린 동쪽에도 한강과 임진강이라는 큰 강이 흘러 남쪽에서 침공하기에도 힘들었습니다. 임진강 아래로는 도라산이라는 산이 있고요.

때문에 뚫린 동쪽 입구에 높은 성벽을 쌓아 방어한다면 사방을 훌륭하게 방어할 수 있는 지형입니다. 이를 알아본 궁예는 왕륭과 왕건을 부하로 삼고 발어참성을 쌓아 도시를 방비했습니다. 이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뒤에 발어참성을 나성으로 재건축하며 방비를 강화해 수도 개경開京의 명확한 범위가 지정되었습니다. 이후 황성과 궁성을 쌓아 황제를 보호하는 성을 추가했고, 고려高麗 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내성을 쌓아 방어력을 더 강화했습니다.

개경開京의 지리는 방어적 목적 외에도 중국과 무역하기에도 매우 좋은 위치였습니다. 한강과 예성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 수운 운송이 쉬웠지요. 덕분에 한반도 전역에서 온 세금과 공물을 배로 운송해 개경開京에 모으기 좋았고,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은 해외로 무역하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덕분에 예성강 하류에 벽란정碧瀾亭과 벽란도碧瀾渡를 세워 최대 무역 항구를 만들어 해외와 교류했지요.

물론 개경開京의 지리적 취약점도 있었습니다. 개경開京은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상당히 좁은 분지입니다. 대구 분지, 평양 일대, 서울 분지와 비교하면 매우 작지요. 그만큼 평야도 좁고 사람들이 모여 살만한 곳이 넓지 않았습니다. 또한 배천白川과 앵계鶯溪가 모여 사천沙川이라는 큰 하천이 흘렀는데, 문제는 사천이 개경에서 가장 큰 하천인데 북한에서 찍은 모습이나 지도를 보면 조선朝鮮 한양漢陽의 물을 책임진 청계천淸溪川보다 더 좁고 물이 없습니다.

이는 사천砂川 이름에도 적혀있지만 큰 하천인 사천砂川은 물을 흡수하는 모래가 많아 물을 많아 사람이 이용할 물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개경開京이 수도가 되고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그들이 마시고 사용할 물이 부족했지요. 그래서 우물을 많이 파 지하수를 끌어다 쓰고 송악산 계곡에 가 샘물을 떠와 부족한 식수를 해결했습니다. 이것 외에도 용수도 많이 필요했기에 황궁과 사찰은 물론 도심 여러 곳에 저수지를 지어 빗물을 저장하며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 개경開京 도시 구조
https://hgis.history.go.kr/kor_g1/main.do
국사편찬위원회 고려개경지리정보
지명 별칭 / 이칭 유형 개요 내용 문화재 정보 집필자 위치비정근거 위치비정신뢰도 위치비정사료 비고 오류신고 1. 개경지리정보 자료소개 2. 표제어의 위치 비정 3. 위치비정신회도 4. 참여인력
hgis.history.go.kr
고려高麗 때 개경開京 모습이 어땟는지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위 국사편찬위원회 고려개경지리정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북공동연구를 통해 알아낸 개경開京의 유적지와 옛 모습을 디지털로 기록한 사이트이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위에서 확인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해요.

지금의 서울특별시가 25개의 자치구와 427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고려高麗 대 개경開京은 5부 35방으로 이루어졌어요. 5부部는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다섯 방위에서 따온 간단한 구역이었고, 방防은 당唐의 방리제坊里制의 그 방防입니다. 개경開京 도시는 방리제坊里制를 모델로 설계되었기에 도시를 35개의 방防으로 나누고 그 안에 또 구획 별로 리里로 나눴지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묘사한 개경 모습](https://blog.kakaocdn.net/dna/CCsQC/dJMcabkFtIm/AAAAAAAAAAAAAAAAAAAAAPlVhP6gBd_bngsKvTSM50VUEU9PfibYjrAZJqlirK7L/img.pn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855099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9%2FUr10HssxVPGhDfKKnOJIhGZoc%3D)
하지만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좁은 분지 특성 상 당唐의 바둑판 같은 직선형이 아닌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로 방리坊里를 나눴지요. 그래서 송宋의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산과 골짜기가 험하고 평지가 적다", "개경開京의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다"라고 기록했지요. 그리고 고려高麗의 귀족이나 유학자도 수도가 너무 좁다고 불평해 다른 곳으로 천도하자는 말이 많이 나왔습니다. 때문에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나고 몽골 지배 이후에는 남경南京으로 천도하자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지요.

그럼에도 이 좁아 터진 땅 안에 있을 것은 있었습니다. 위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개의 큰 길을 중심으로 각종 거대한 사찰이나 시설들이 세워졌지요. 위 지도에서 내제석원이라고 적혀있는 구역, 즉 검은 테두리 안이 황제가 사는 황궁입니다. 이 황궁에서 동쪽에 보면 광화문光化門이 있는데 황궁으로 입성하는 황성의 정문이에요. 이 정문에서 배천白川을 따라 큰 길이 나 있는데 이게 개경開京에서 가장 큰 길인 남대가南大街입니다. 이 길을 중심으로 사방에 길이 나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했지요.

그리고 위 지도에서 초록 동그라미로 칠해진 사찰이 많은 걸 알 수 있습니다. 고려高麗가 불교 국가이고 국부 태조 왕건이 훈요 10조에 불교를 장려할 것을 명시했기에 황제와 귀족이 많은 사찰을 짓고 후원해서 절이 매우 많았습니다. 옛날 일본의 헤이안쿄平安京(현 교토京都)처럼 큰 길마다 절이 있고 높이 솟아오른 탑이 있었습니다.
- 좁은 땅이 불러온 살인적인 집 값

아까부터 저는 계속 개경開京의 땅이 좁다고 강조했습니다. 허나 이런 작은 땅이 수도가 되고 태조 왕건의 정책에 따라 전국 각지의 호족들이 개경開京에 몰려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지요. 그 와중에 호족들을 견제하겠다고 과거를 실시해 새로운 권신을 등용했습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개경開京에 더 많은 권신이 집을 지어 살았지요. 근데 [의식주衣食住 : 주거 가옥] 편에서 언급했듯이, 권력이 있는 귀족과 권세가는 민가를 헐고 백정을 내쫒아서라도 커다란 저택을 지어 살았습니다. 이들이 노른자 땅을 전부 차지하는 바람에 안그래도 좁아 비싼 땅이 더더욱 비싸졌지요.

이는 집 값이 미친듯이 오르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저택 수준은 아니고 열칸이 안되는 작은 집이지만, 그래도 좀 있는 집안의 자제가 머물 만한 기와집의 가격은 은병 2~3병이나 삼베 150필 정도였습니다. 이걸 오늘날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1,200만원 정도였지요. 저택이라면 은병 5병이 넘으니 1억이 넘었고요. 이는 당시 고려高麗 사람들의 중위소득을 연간 200만원으로 추정할 때 나온 가격입니다. 아무 것도 쓰지 않고 5-6년을 벌어야 겨우 하나 장만할 수 있었지요. 지금 한국의 물가로 환산하면 4인 중위소득을 대충 연간 7,200만원으로 기준 잡아 계산하면 집 값이 43억이네요. 브리시엘도 아니고 푸르지오 정도 되는 집이 43억이면 얼마나 비쌌는지 확 체감됩니다. 그래서 막 과거 시험을 보거나 출세하기 위해 개경開京으로 상경한 젊은 지방 귀족이나 유학자가 비싼 개경開京 집 가격을 보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이렇게 땅 값과 집 값이 말도 안되니 가난하게 살던 백정은 개경開京에서 발을 딛고 살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권력이 있는 귀족은 법도 제도도 없이 갑자기 사병을 이끌고 나타나 집을 부수고는 내쫒았죠. 그래서 백정들은 어쩔 수 없이 산 골짜기 등 살기 척박한 곳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움집을 짓고 옹기종기 모여 살았지요. 마치 한국전쟁이나 새마을 운동 때 빈민들이 산 꼭대기에 판자집을 형성해 살았던 것처럼 말이죠. 때문에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백정들의 집은 개미집처럼 빽빽하게 모여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형성된 시전市廛

우리가 잘 아는 조선朝鮮의 경복궁景福宮의 정문은 광화문光化門이지요. 고려高麗 때는 황성皇城 정문의 이름이 광화문光化門이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光化門의 남쪽에 개경 나성의 남쪽 정문인 회빈문會賓門이 있습니다. 이 광화문光化門에서 시작해 회빈문會賓門으로 이어지는 길이 남대가인데, 이 남대가南大街에 거대한 시전市廛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유는 남대가南大街는 황제가 개경開京에서 벗어날 때 이용하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행차하는 길이었기에 개경開京의 다른 길보다도 더 크고 넓었지요. 이 중요한 길에 황실은 상인들이 시전市廛을 열어 활발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덕분에 시전市廛에 종이를 파는 가게, 금붙이 장식을 파는 가게, 차나 도자기를 파는 가게 등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섰습니다. 부유한 귀족과 백정은 시전市廛에 방문해 필요한 물건을 구매했지요. 일부 가게는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가게여서 세금을 간접적으로 메기기도 했습니다.

남대가南大街에 시전市廛을 연 것은 송宋의 가항제街巷制를 따라한 것입니다. 송宋은 수도인 개봉開封(현 명칭: 카이펑开封)과 임안臨安(현 명칭: 항저우杭州)의 대로에 큰 시장을 열어 활발한 시장을 만들었지요. 고려高麗도 이를 따라해 국가에서 남대가南大街 길을 따라 가게 건물을 짓고 상인들을 받았습니다. 그 모습이 매우 긴 회랑이 이어지는 것 같다고 해서 장랑長廊이라고 불렸지요. 기록에 따르면 남대가南大街와 동서대로東西大路가 교차하는 십자가十字街에 1,000칸이 넘는 연립장랑連立長廊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번성한 시전市廛에는 다양한 가게들과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차를 판매하고 대접하는 다방茶房 및 다점茶店과 술을 판매하는 주점酒店이지요. 여기서 다방茶房과 다점茶店은 다릅니다. 다방茶房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시설로 주로 황실 혹은 외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한 차茶와 다과茶菓, 과일이나 약재 등을 관리하고 납품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점茶店은 민간 시설로 지금의 카페와 같은 역할이었지요. 이규보 등 문인이 적은 기록에 따르면 다점茶店은 평범한 백정도 방문해 값을 지불하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낮잠을 잘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주점酒店은 뭐 지금의 술집이나 칵테일바와 비슷합니다. 술 파는 곳이죠.

또다른 특징으로는 시전市廛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돼지를 판매하는 저전猪廛이 따로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중인은 양고기를 선호했지만, 송宋에서 수입해야 하는 양고기는 너무 비싸 평소에는 돼지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시켜 저전猪廛에서 돼지를 산 뒤 도축해 고기를 요리해 먹었지요. 이 저전은 높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수많은 돼지를 키웠고 그 과정에서 나온 오물이 근처 사천沙川으로 흘러 검게 오염되고 냄새가 심하게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천沙川을 검은 시냇가라는 뜻으로 오천烏川이라 불렀지요.

돼지고기는 귀족이나 부유한 중인들이 주로 먹던 것으로 평범한 백정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대신 생선을 사 먹었지요. 예성강, 한강, 서해 바다에서 난 물고기를 가공한 생선이 어물전魚物廛에서 팔렸는데 건어물부터 시작해 염장 생선, 젓갈, 식해 등이 판매되었습니다.
- 일본에 남아있는 고려高麗 가게 모습

그럼 이제 시전市廛에 있는 가게 모습들을 알아보지요. 가게에 사람이 모이고 물건이 팔리려면 가게가 어떤 가게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LED 간판을 입구 위나 기둥에 달지요. 고려高麗 때도 비슷했습니다. 고려高麗 때 가게 문 앞에 큰 휘장揮帳이나 포렴布簾을 드리우고 문양이나 한자를 적어 어떤 가게인지 알리고, 처마에는 현판懸板을 달아 가게 이름을 알렸지요.

혹은 문 앞에 깃대를 세우고 큰 깃발을 달아 가게 이름을 알렸습니다. 다점茶店은 다기茶旗라는 깃발을 달고, 주점酒店이라면 주기 酒簾를 달아 멀리서도 잘 보이게 했지요. 지금 어디서 개업하면 화환과 풍선인형, 그리고 깃발 장식을 달아 멀리서도 눈길을 끌게 한 것과 비슷했습니다. 어두운 밤이면 가게를 알리는 문양이나 한자가 적힌 상점등商店燈을 문 앞 기둥에 걸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 빛을 보고 가게를 알게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 일본에 가면 특히 정통 라멘 가게나 스시집, 이자카야 등에서 많이 보이는 형식이지요.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모습은 상업이 번성한 송宋에서 시작한 문화입니다. 송宋의 도시에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서며 서로 자기를 알리는 과정에서 휘장과 현판, 포렴, 깃발, 상점등, 기둥 장식 등을 추가했죠. 송宋의 일상을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저 문화가 송宋을 넘어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진 것으로 지금은 일본에 가장 잘 간직되어 있고,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차이나타운에도 저런 모습이 조금은 남아있습니다.

당연히 고려高麗는 물론 조선朝鮮 때도 가게의 모습이 저런 모습이었지요.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조선식 가게 모습이 아닌 일본식 가게 모습으로 바뀐 것인데, 해방 후 조선의 가게 모습을 까먹은 상태에서 포렴과 휘장, 상점등이나 깃발을 보고 저건 왜색이다 하며 무조건적인 검열과 삭제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우리의 전통 모습도 함께 말살해버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가게 입구에 포렴이 걸려 있으면 일본 문화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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