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려진 폐허에서 제2 도시로 부활하다

평양平壤 한자를 뜻 풀이하면 넓은 땅을 의미하지요. 그 이름대로 평양平壤은 한반도에서 3번째로 큰 평야인 평양평야를 보유한 도시입니다. 덕분에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 그리고 지금의 북한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지요. 특히 고구려高句麗 때 크게 개발되어 수많은 인구가 살았던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허나 삼한일통三韓一通 과정에서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하며 평양平壤 도시도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당唐과 신라新羅는 막대한 소모전 끝에 평양平壤을 점령했기에 본전을 뽑기 위해 약탈하고 고구려高句麗 부활을 차단하기 위해 도시 전체를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동강大同江을 기준으로 국경선을 그었지요. 때문에 평양平壤은 당唐과 신라新羅 영토 경계면에 속하며 버려진 무주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만주 지역에서 발해渤海가 등장해 평양平壤까지 세력을 넓혔으나 여전히 국경 인근 버려진 무주지였습니다. 이는 후삼국시대에도 이어져 풀만 무성한 폐허였지요.

삼한三韓을 다시 하나로 합친 태조 왕건은 고구려高句麗 부활을 천명하며 폐허인 평양平壤을 개발했습니다. 먼저 일개 무주지였던 곳을 서경西京으로 승격해 군사 도시로 개발했지요. 무너져 내린 고구려高句麗 시기 성벽을 보강하고 대동강大同江을 통해 막대한 물자를 보급하며 건물을 지어 북벌을 위한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이어 지방 호족의 사병을 서경西京으로 올려보내고 발해渤海 유민들을 서경西京에 정착하게 하며 빠르게 대도시로 재건했지요. 이렇게 고려高麗에 이르러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는 제2도시로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 군사 요새였던 서경西京

서경西京은 대동강大同江과 보통강普通江 사이로 고구려高句麗 시기에 성곽을 쌓아 도시로 개발되었습니다. 고려高麗는 이 고구려가 설계한 도시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했지요. 성곽은 고구려高句麗 시기에 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 북성北城으로 4중 방어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고려高麗 때 이를 그대로 유지해 천자국에 맞춰 재성在城, 나성羅城, 황성皇城, 궁성宮城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4중 방어 체계를 구축했지요.

그리고 황성皇城 안에 장락궁長樂宮이라는 큰 궁궐을 지었습니다. 장락궁長樂宮은 개경開京에 있는 정궁正宮과 동일한 위상을 가진 궁궐이었습니다. 별궁이 아니라 또 다른 본궁이었지요. 황제가 서경西京에 머물 때면 장락궁長樂宮에서 생활하며 신하와 의논하고 정무를 봤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장락궁長樂宮이 어디에 있고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하나도 몰라요.

그리고 태조 왕건의 유언인 훈요 10조에 따라 황제는 서경西京으로 자주 행차하고 고려군을 배치시켰습니다. 이 때 황제는 주로 동쪽에 위치한 정문인 대동문大同門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쉽게도 지금 남아있는 대동문大同門은 임진왜란 이후 지어진 문으로 고려高麗 당시 대동문大同門이 어떻게 생겼을지는 모릅니다. 북한에서 연구를 안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여요전쟁이나 여진정벌 등 북방에 전쟁이 나면 고려군은 서경西京에 집결한 뒤 서문인 보통문普通門을 열고 북방으로 진격했습니다.

황제 행차나 전쟁 발발 같은 큰 사건이 아닐 경우, 서경西京에서는 군사 훈련과 북방 적이 쳐들어오는지 감시하는 초계 활동을 했습니다. 이는 주로 고도가 높은 북성北城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곳이 그 유명한 만수대萬壽臺입니다. 만수대萬壽臺는 서경西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어서 전경이 훤히 보여 군사 훈련이나 지휘를 담당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 만수대萬壽臺는 북한에서 체제 선전을 위해 만수대기념비 등을 만들어 고려高麗 유적지를 완전히 덮어버렸지요. 그래서 고려高麗 때 어땠을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지휘를 담당하는 언덕 만수대萬壽臺 북쪽에는 서경西京에서 가장 높은 금수산錦繡山 모란봉牡丹峯과 을밀대乙密臺가 있었습니다. 을밀대乙密臺는 가장 높은 곳으로 감시 초소로 활용되었지요. 기록에 따르면 태조 왕건은 을밀대乙密臺에 임시 별궁을 지어 며칠 머물렀고, 여진정벌이 한창이던 예종 때는 을밀대乙密臺 바로 아래에 용덕궁龍德宮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용덕궁龍德宮 역시 지금은 접근도 못하고 연구도 안되어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죠.
- 고구려高句麗의 혼을 간직한 도시

도시는 군사 요새로 만들었지만 사람이 사는 도시이기 때문에 각종 편의 시설 등도 만들었지요. 대표적인 시설은 사찰이었습니다. 고려高麗는 불교 국가로 병사들은 부처에게 안녕을 빌었습니다. 그래서 사찰은 병사들이 쉬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중요한 시설이었지요. 이에 따라 태조 왕건 때부터 폐허가 된 땅 위에 고구려高句麗 사찰터를 찾아 그 위에 절을 다시 짓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덕분에 중흥사中興寺, 영명사永明寺, 금강사金剛寺 등 고구려高句麗 사찰이 다시 세워지거나 더 크게 중건되었습니다. 특히 중흥사中興寺는 9층 목탑이 있어 멀리서도 잘 보였다고 하네요.

또다른 유명하고 중요한 사찰로는 흥복사興福寺가 있었습니다. 서경西京으로 행차한 황제가 반드시 들러 공양을 드린 사찰로 간간히 큰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흥복사興福寺는 조선朝鮮 때 철거되다 일제강점기 때 부활해 지금은 다른 장소로 이전한 상태라고 하네요. 대신 흥복사興福寺 칠층석탑은 고려高麗 때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보물이기도 하지요.

또한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인 동명왕도 극진히 모셨습니다. 고구려高句麗 때 장수왕이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천도하며 동명왕릉을 평양平壤으로 옮긴 뒤, 그 앞에 정릉사定陵寺라는 큰 사당을 세워 동명왕을 모셨습니다. 동명왕릉과 정릉사定陵寺를 합쳐 동명왕사東明王寺라고 불렀지요. 이 사당은 고구려高句麗 멸먕 후 버려지다 고려高麗 때 재건되어 황제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쓰였습니다. 이는 고려高麗가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국가임을 공포하는 의식이었지요.
- 풍요로웠던 서경西京에서의 삶

서경西京은 지금 대한민국의 포천이나 철원처럼 북방 군사 도시였지만, 동시에 북방 국가들과 교류하는 무역 도시였습니다. 거란契丹이나 여진女眞하고 거래했으며 북방 민족으로부터 진귀한 모피나 말 등을 얻어 개경開京과 내륙에 판매하는 중계 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습니다. 거기에 국가에서 평안도 일대에서 난 세금은 서경西京이 모두 사용하도록 특혜를 줘, 고려高麗의 제2도시로서 막대한 부와 지위를 누렸습니다.

이런 특혜만 해도 엄청난데 땅 자체도 좋았습니다. 드넓은 평야 한가운데로 거대한 강인 대동강大同江이 흘러 식수와 수운 유통로를 확보했습니다. 덕분에 물 부족 현상은 없었고 대량의 곡물을 생산하고 도시로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대동강大同江에서 숭어가 많이 잡혀 주민들은 밥과 숭어, 각종 수산물을 먹으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땅이 넓으니 집 값도 개경開京보다 저렴해 훨씬 더 큰 저택을 지어 살고 백정들도 넉넉한 땅에서 살 수 있었지요.

이렇게 살기 좋다보니 서경西京 사람들은 도시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벌을 추진하는 군사 도시이다보니 서경西京 사람들은 도시 정체성에 맞춰 활쏘기와 기마 등 무예를 익히기를 좋아했습니다. 때문에 고려高麗 무신 중에 서경西京 출신이 많았지요.
- 막장에 막장으로 간 서경천도운동

수도인 개경開京은 좁고 물이 부족해 살기 참 힘들었는데 서경西京은 비옥한 토양에 풍부한 물 덕분에 삶이 윤택했습니다. 그래서 고려高麗 초기에 서경西京을 수도로 천도하자는 의견이 간간히 나왔지요. 이 서경西京 천도 주장이 가장 강했던 시기는 이자겸이 금金의 화친 요구를 수용한 이후였습니다. 이자겸은 자기 세력 보존을 위해 금金과 형제 관계를 맺는 것을 일방적으로 추진했으며, 황제는 이자겸의 월권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허나 개경開京 귀족들은 전부 이자겸의 수족에 놓여 있어 여론을 무시하기 어려웠지요. 이는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경西京 사람들은 이를 좋은 기회로 보고 황제 인종의 편을 들며 적극적으로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했습니다. 묘청과 정지상이 인종을 설득해 서경천도운동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지요. 서경西京에 대화궁大華宮이라는 큰 궁궐을 짓고 인종을 초대해 정전에 모시는 등 극진한 준비를 했지요.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구려高句麗 궁궐로 여겨졌던 안학궁安鶴宮이 대화궁大華宮이었을거라는 추정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하네요. 여튼 묘청은 한술 더 떠 대동강大同江 안에 기름 떡을 넣고는 떠오르는 노란 기름을 인종에게 보이면서 용의 침이라고 말하며 바람을 넣었습니다. 물론 유학자들이 그 곳에 잠수부를 보내 기름떡을 숨겼다는 것을 들켰지만 말이죠.

이런 무리수를 둔 이유에는 이상하리만큼 서경천도운동이 삐꺽거렸기 때문입니다. 희한하게 대화궁大華宮을 짓거나 인종이 행차할 때 비바람에 우박, 천둥번개가 쳤지요. 심지어 한여름에 대화궁大華宮에 번개가 30번 내려쳐 건물이 불타버리는 참사도 일어났습니다. 이에 묘청은 본인이 하늘의 상제에게 황제가 서경西京으로 갈 때는 비바람을 부르지 말라고 요청했는데 하늘이 약속을 버렸다며 하늘 탓을 했습니다.

이상하리만큼 악재가 반복되자 평소에 길흉화복 등 괴력난신을 논하는 걸 거부하던 유학자들도 이 정도면 서경西京으로 천도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하고 묘청에게 물어볼 정도였지요. 한번은 중흥사中興寺가 벼락을 맞아 전부 불타버리자 개경開京 유학자들이 묘청에게 "당신 말대로라면 서경西京은 길지인데 왜 맨날 번개 맞고 불타는 천재天災가 일어나느냐?"라고 질문했고, 묘청은 대답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지요.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자 결국 묘청과 정지상은 독자 연호를 발표하고 나라 이름을 위爲로 지으며 반란을 일으켜 개경開京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묘청의 난입니다. 서경西京 사람들은 황제를 모실 대화궁大華宮의 용좌는 비워둔 상태로 진압군과 싸웠고, 1년의 항쟁 끝에 패배했습니다. 그 대가로 대화궁大華宮 역시 불타 사라졌지요.

반란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동안 서경西京이 가진 모든 혜택은 전부 몰수당하고 자치권인 분사分司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개경開京에서 감군監軍이 파견되어 직접 통치로 바뀌었지요. 여전히 경京으로 불렸지만 사실상 일개 지방 도시로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서경 사람은 전국에서 노골적인 차별과 멸시를 당했으며 서경西京 자체가 욕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나마 향鄕과 부곡釜谷 신세가 되지 않은 거에 감사해야 했지요.
- 진짜로 반역 도시가 된 서경西京

이런 핍박의 대가였을까요, 이후 몽골이 침입하자 서경西京은 바로 나라를 배신했습니다. 서경西京을 통치하던 홍복원은 몽골군이 침공하자 바로 성문을 열고 자진 항복했습니다. 더불어 몽골군의 길잡이가 되어 고려高麗 본토를 유린하는데 앞장섰지요. 몽골의 거센 공격에 황제와 무신정권이 개경開京을 버리고 강도江都로 도망치자 아예 서경西京과 북계北界 전체를 몽골에 바쳤습니다. 그게 동녕부東寧府로 원元의 땅이 되었지요. 원元은 이후 충렬왕 때 동녕부東寧府를 고려에게 되돌려줍니다만, 배신자 홍복원의 후손은 이미 원元에 귀화해 호의호식했습니다. 이렇게 원元의 땅이 되다 다시 고려高麗 땅이 되는 혼란기 때문에 행정력은 사실상 증발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高句麗 멸망 이후 때처럼 사실상 버려진 도시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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