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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식주衣食住

[의식주衣食住 : 도시와 촌락] 당唐과 송宋이 확립한 도시 계획

by 롱카이 2026.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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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를 바둑판으로 만든 당唐의 방리제坊里制

천하의 주인이 된 당은 도시를 새로 정비했다
천하의 주인이 된 당은 도시를 새로 정비했다

후한後漢에 시작된 오랜 내전을 끝내고 주변 이민족을 복속시키며 천하 패권을 손에 쥔 당唐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 도시를 새로 정비했습니다. 한漢부터 수도였던 장안長安(현 중국어 명칭: 시안西安)이 오랜 전란으로 초토화되어 아무것도 없으니 아예 새로 시작하기 좋았지요. 그래서 허허벌판인 관중 평야 한가운데에 있는 수도 장안長安을 거대한 사각형으로 범위를 지정한 뒤, 바둑판처럼 대로와 작은 길을 직선으로 배치해 도시를 설계했습니다.

당의 수도 장안은 방리제로 설계된 계획 도시였다

정중앙에는 황제가 사는 황궁을 크게 배치하고 그 앞으로는 큰 길을 내 성문과 황궁을 바로 연결했습니다. 이렇게 만든 큰 길을 중심으로 성곽 안에 여러 작은 사각형 모양의 블록을 만들고 그 블록을 또 높은 담장으로 둘러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각 구역마다 신분 별 사람들이 모여 살게 했지요. 이것이 방리제坊里制로 마을里을 사각형 모양 담장 안防에 배치한 도시 계획이었습니다. 이 배치는 옛날 중국에서 저술한 유학 경전인 주례周禮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도시를 실현한 설계였습니다.

드넓은 평야에 거대한 담장을 두르고 도시를 방과 리로 나눴다

이렇게 마을을 구분하면 평상시에 세금을 걷고 범죄를 감시 및 예방하는 등 행정과 치안 면에서 편리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방防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아 혹시 모를 음모나 역모를 막기에도 좋았지요. 덕분에 황제의 신변은 물론 귀족과 백성들의 치안도 눈에 띄게 좋아졌고 장안長安은 각종 나라에서 온 사람과 물자가 모이며 번성했습니다. 천하의 중심지다운 대도시가 되었지요.

방리제의 핵심 주작대로

아까도 언급했지만, 도시를 지키는 성문을 중 가장 큰 남문을 열고 들어가 황궁까지 가는 큰 길을 주작대로朱雀大路로 불렸습니다. 이 길은 황제가 행차하는 길이자 외국 사신이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즉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닌 권위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된 길이지요. 또한 길도 매우 커 평상시에는 황제의 대규모 행차단이 동시에 이동할 수 있었고, 위급할 때에는 수많은 병력이 황제를 보호하러 집결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주작대로朱雀大路는 여러모로 유용해 방리제坊里制의 핵심이었지요.

후당의 수도 낙양에 도입한 방리제
후당의 수도 낙양에 도입한 방리제

당唐은 수도이자 서경西京인 장안長安을 성공적으로 개발한 뒤, 서쪽 이민족의 침입이나 내란에 대비해 동쪽에 세울 동경東京도 똑같이 방리제坊里制로 설계했습니다. 그 동경東京은 낙양洛陽(현 중국어 명칭: 뤄양洛阳)으로 당唐의 바로 전 시기인 수隨를 비롯해 수많은 중화 문명의 수도였습니다. 측천무후는 수도를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바꾸며 새로운 천하 중심지가 되었지요. 낙양洛陽에 도입한 방리제坊里制 역시 매우 성공적이어서 주변국은 중국의 방리제坊里制를 보고 따라했습니다.

 

 

 

  • 한자문화권의 기본 도시 계획이 된 방리제坊里制

발해 상경성
발해 상경성

고구려高句麗 멸망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발해渤海는 당唐의 제도와 문물을 열심히 모방했습니다. 그리고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역시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처럼 바둑판 모양의 방리제坊里制로 설계했습니다.

월성 뒤에 새로 조성된 방리제 구역
신라 월성 뒤에 새로 조성된 방리제 구역

당唐보다 한참 전에 건국된 신라新羅의 수도 서라벌은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통일성 없이 재각각 설계된 도시였지요. 하지만 삼한일통三韓一通을 이뤄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 말갈靺鞨 그리고 가야伽倻 사람들이 서라벌에 모이며 인구가 폭증하자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고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이 도시에 잘 적응하게 하기 위해 월성月城 뒤를 방리제坊里制로 설계해 받아들였습니다. 덕분에 서라벌에 인구가 약 100만명이나 모일 정도가 되었지요.

주례에 따라 독자적으로 설계한 후지와라쿄

일본日本의 전신인 야마토국大和國의 지토 천황은 현재 나라현奈良県 지역에 후지와라쿄藤原京 도시를 새로 지었습니다. 이 때 막 도입한 주례周禮에 따라 도시를 설계했는데, 천황의 궁을 도시 한가운데에 배치하고 남북에 큰 길을 낸 뒤 정방형正方形 방防끼리 이어붙여 수도를 만들었습니다. 당唐의 방리제坊里制를 도입한 건 아니지만 비슷하게 만들었지요.

일본 헤이조쿄
후지와라쿄를 거대화한 헤이조쿄

허나 현실의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주례周禮에 적힌 이상적인 도시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문제점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겐메이 천황 때 주례周禮를 따르되 좀 더 현실에 맞춰 수정한 더 큰 도시 헤이조쿄平城京를 건설해 그곳으로 수도를 천도했습니다. 헤이조쿄는 정북쪽에 천황궁을 세우고 궁 남쪽으로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세워 교통을 편리하게 했습니다.

교토 평야에 세워진 헤이안쿄
교토 평야에 세워진 헤이안쿄

그러다 당唐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각종 율령과 법제를 받아들여 통치 체계를 구축한 일본日本은 작고 좁은 나라奈良에서 벗어나 대평야가 있는 교토京都 일대로 수도를 천도했습니다. 이 때 새로 만든 수도가 헤이안쿄平安京로 당唐의 방리제坊里制를 도입해 만든 최초의 도시입니다.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세워 궁성과 연결했고 주변에 높은 담으로 둘러싼 정사각형 모양 방防을 세웠지요. 이후 헤이안쿄平安京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부터 에도 막부江戶幕府 전까지 천년의 세월을 수도로 지내왔습니다. 교토京都의 천년 고도 전설이 이 때 시작된 것이지요.

요나라 상경임황부
요나라 상경임황부

중화에서 당唐이 멸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기가 찾아올 때 북방에서 빠르게 패권을 잡은 거란契丹 역시 요遼를 건국하며 5개의 경京을 두었는데 그 중 최초의 경京이자 최대 경京인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지을 때 방리제坊里制로 지었습니다. 다만 유목 민족 특성상 떠돌이 생활을 추구하지, 모여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가 현 내몽골 일대라는 춥고 척박한 곳에 위치해 있어 규모가 작았습니다.

 

 

 

  • 송宋이 추진한 가항제街巷制

높은 담장 대신 상점을 길가에 배치해 상업을 장려한 송의 가항제
높은 담장 대신 상점을 길가에 배치해 상업을 장려한 송의 가항제

당唐의 방리제坊里制는 성공적인 도시 계획이어서 한자 문화권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표준이 된 도시 모델입니다. 하지만 방리제坊里制도 한계가 있었지요. 높은 담장으로 방防을 나눠 상대쪽 방防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려웠고 밤이 되면 방防 밖으로 나가기 어려워 정작 도시 안 네트워크가 약했습니다. 그래서 경제 교류가 정작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송宋은 높은 담장을 허물고 자연 지형에 맞춰 길을 낸 뒤, 대로변에 상가를 지어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하는 변화를 꾀했습니다. 이를 가항제街巷制라고 부르지요.

가향제는 상업의 폭발적 성장을 이뤘다
가향제는 상업의 폭발적 성장을 이뤘다

담장이 사라져 옆 마을에서 뭐하는지 보이고 길가에 가면 각종 물건을 팔아 필요한 걸 즉각적으로 살 수 있게 되자 백정들은 마을에서 나와 도시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물자를 옮겼습니다. 거기에 황제가 밤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허용하자 밤에 여는 야시장과 각종 구경거리를 여는 장소들이 우후죽순 생기며 도시 내 네트워크가 활발해졌습니다. 가항제街巷制가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지요.

송의 가항제에 맞춰 자연 지형을 유지한 고려 개경
송의 가항제에 맞춰 자연 지형을 유지한 고려 개경

이런 송宋의 가항제街巷制는 고려高麗의 수도 개경開京 도시를 설계하는데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개경開京은 행정적으로는 당唐의 방리제坊里制를 따른다고 했으나, 현실적으로 좁은 분지 지역에 바둑판 모양의 도시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해 송악산 지락에 맞춰 도로를 내고 구역을 나눴습니다. 그래서 개경開京은 방리제坊里制와 가항제街巷制가 혼합된 도시가 되었지요.

리 왕조 대월의 수도 탕롱
리 왕조 대월의 수도 탕롱

한편 당唐의 멸망으로 중화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대월大越도 탕롱昇龍(현 월남 명칭: 하노이河內/Hà Nội)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허나 탕롱昇龍은 큰 강과 호수는 많은데 사람이 발 디딜 땅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송宋의 가항제街巷制를 벤치마킹하되 그것보다는 좀 더 구획을 나눠 황제 구역, 승려 구역, 귀족 구역, 백성 구역을 명확히 나누는 형태로 도시를 설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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