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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식주衣食住

[의식주衣食住 : 주거 가옥] 방마다 있는 가구와 시설

by 롱카이 2026.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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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식 환경에 맞춘 가구

공민왕의 [기위도]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그림에 묘사된 청자 의자
공민왕의 [기위도]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그림에 묘사된 청자 의자

전의 포스팅에서도 계속 언급했지만, 고려高麗 때는 입식立式 문화가 발달했기에 집안에 돌아다닐 때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수혈주거에 사는 백정들도 집 안에서는 신발을 신고 돌아다녔으며, 잠을 청하는 멍석말이 위에서나 신발을 벗고 누워 잠을 잤습니다. 환경이 이렇기에 대부분의 가구도 입식立式 위주로 설계되었지요.

소빙하기 이후 모든 가구는 좌식을 기준으로 바뀌었다
소빙하기 이후 모든 가구는 좌식을 기준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이런 입식立式 중심 가구는 소빙하기 이후 온돌이 모든 신분의 집안에 다 도입되며 급격히 소멸했다는 점입니다. 양반들도 바닥에 앉아 생활하며 가구는 좌식坐式 중심으로 바뀌었지요. 모든 가구는 다리가 작아지고 땅바닥에 딱 붙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이 상태로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갔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한반도 문화는 좌식坐式이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나 고려高麗와 조선 전기朝鮮前期 때는 다른 모습이었지요. 그럼 각 방마다 어떤 모습이었는지 볼까요?

 

 

 

  • 햇빛과 바람을 막고 공간을 분리한 실내 가구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때 종이가 귀해 창문은 대나무를 박은 송송 뚫린 형태였다

삼한일통三韓一通을 이룬 신라新羅 때까지만 해도 종이가 매우 귀해 문은 나무로 만든 통문으로, 창은 대나무를 끼운 발로 만들어 공간이 비었습니다. 때문에 여름이나 겨울이나 뚫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왔지요. 하지만 고려高麗 때 종이가 상류층에게 보급되며 문과 창을 종이로 덮어 막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지요.

살창에 대나무 발을 설치한 모습

그럼 여름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여름에는 바람이 통해야 하니 두꺼운 종이를 치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종이로 덮은 문과 창은 뜯어내고 대신에 얇은 비단을 두른 사창紗窓이나 신라新羅 때처럼 아예 구멍이 뚫린 살창箭窓을 배치해 산들바람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아니면 문과 창을 아예 천장으로 들어올리거나요. 이렇게 통풍을 해결하니 다음 문제는 햇빛이었습니다. 따사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대나무 발을 창가에 늘어뜨려 빛이 살짝 들어오게 했지요. 이렇게 시원한 여름 실내를 만들었습니다.

커튼과 동일한 역할을 한 휘장

그리고 봄가을이나 겨울에는 비단으로 만든 휘장揮帳을 둘러 보온과 통풍을 조절했습니다. 봄가을이면 얇은 휘장揮帳으로 햇빛과 바람이 통과해 선선한 실내를 만들고 따사한 분위기를 연출했지요. 추운 겨울이면 두꺼운 휘장揮帳을 벽과 창가에 둘러 냉기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정확히 현대의 커튼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 도구였습니다.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에서 복원한 휘장

또한 휘장揮帳은 실내를 구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대저택이라도 각 공간마다 일일이 문을 설치하기는 어려웠고 기분에 따라 실내에 임시로 또 공간을 나누는 등 일이 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휘장揮帳을 둘러 공간을 구분했습니다. 일종의 임시 문 역할을 수행했지요. 귀족이 휘장揮帳 너머로 가려고 하면 시종이 휘장揮帳을 양 옆으로 걷어 들어가게 했습니다.

바람가리개로 시작한 병풍

대나무 발이나 휘장揮帳과 비슷한 역할을 한 또다른 가구로 병풍屛風이 있습니다. 옛날에 집을 지을 때 아무리 정교하게 지어도 나무로 만든 집에다 지금처럼 기계로 오차없이 정밀히 가공한 게 아니니 언제나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찬바람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 병풍屛風이지요. 중국 한대漢代에 바람막이로 등장한 병풍屛風은 당대唐代부터 얇은 비단에 각종 화려한 자수를 더하는 장식품으로 발전했습니다.

고려 말 자수사계분경도 복원 모습

당대唐代까지만 해도 병풍屛風은 일자형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접이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들고 다니는 이동식 가구였기에 접어서 이동하기 편리하라고 그리 만든 것이지요. 또한 한반도는 겨울 바람이 매서워서 얇은 비단으로는 바람을 막지 못하니 크고 두꺼운 비단을 겹쳐 거대하고 무거운 병풍屛風을 만들어 설치했습니다. 때문에 병풍屛風이 얇은 중국, 월남, 일본과 달리 고려 말에서 조선 때의 한국 병풍屛風은 매우 크고 두꺼웠습니다.

 

 

 

  • 휴식을 취하는 침실의 가구들

침실의 가구들
침실의 가구들

귀족이나 좀 잘 사는 사람들은 집 안 침실寢室에 침상寢牀을 둬 바닥 위에 떠 있는 목조 가구 안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렇게 하면 바닥의 온도가 잠을 자는 동안 전해지지 않아 언제나 아늑한 환경에서 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몸을 뒤척이다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팔걸이 등을 둬 떨어지지 않게 막아 좋은 잠자리 환경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그 주변에는 옷이나 장신구 등을 보관하는 여러 가구가 있었습니다.

기둥이 달린 와탑과 작은 왜탑
기둥이 달린 와탑과 작은 왜탑

그 중 먼저 침실寢室의 핵심인 침상寢牀부터 보지요. 바로 전 포스팅에 침상寢牀을 다루긴 했지만, 여기서는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려高麗 대 침실寢室은 여전히 차가운 전돌이었기에 나무로 만든 침상을 이용했는데, 황실과 귀족이 사용하던 것은 와탑臥榻이라는 다리가 긴 침상寢牀이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와탑臥榻 아래에 성인 남성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꽤나 높이 뜬 침상寢牀이죠. 와탑 안에 최고급 비단을 짜 만든 두꺼운 이불인 보료錦褥를 깔고 네 기둥 위로 받치는 천장에 휘장을 달아 아래로 늘어뜨려 자는 모습을 가렸습니다. 와탑臥榻 아래에는 왜탑矮榻이라는 작은 가구를 둬 신발을 벗고 맨 발로 딛는 공간을 만들었지요.

백인제 가옥에 복원된 와탑과 보료

이런 와탑臥榻 모습은 조선 후기朝鮮後期에도 높이가 낮아졌지만 남아있더군요. 조선 중기朝鮮中期 이후에는 평상平床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비단 안에 솜을 넣어 푹신하게 만든 보료錦褥를 깔고 그 위에 장침長枕과 단침短枕, 안석案席을 올려놓아 등, 팔, 머리를 대고 앉아 일하거나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고려 때는 위의 조선 후기 때 평상 모습과 비슷하지만, 와탑 다리가 길어 높이 떠 있고, 보료 안에 솜이 아닌 빽빽하게 채워 넣은 무명이 있고, 안석이 없었지요.

개방된 모습의 와탑
개방된 모습의 와탑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주인의 취향에 따라 와탑臥榻 모습도 달랐습니다. 송대宋代 그림이나 조선朝鮮에 남은 침상寢牀 모습을 보면 네 개의 기둥으로 떠받쳐 휘장으로 가리는 와탑臥榻 외에도 지금의 소파처럼 생긴 와탑臥榻도 있었습니다. 개방된 와탑臥榻은 밤에는 자고 낮에는 비스듬이 누워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읽고 손님과 나란히 마주 앉아 차茶를 나누며 담소를 하는 가구로 이용되었습니다.

나전칠기 문양을 한 와탑
나전칠기 문양을 한 좌탑

여름에는 탁 트인 시원한 공간에 좌탑坐榻을 배치해 그 위에 누워 낮잠을 잤습니다. 입식立式 문화였기에 땅바닥에 드러눕는 것 대신 좋은 자리 위에 좌탑坐榻을 놓았지요. 이 좌탑坐榻은 대청大廳(대청마루)이나 행랑行廊, 누각樓閣, 혹은 그냥 야외에 있는 맨 땅바닥 등 가리지 않고 설치해 눕는 가구로 알뜰히 활용되었습니다. 이동식 침상寢牀이었죠.

옷과 화장품, 장신구 등을 보관한 함
옷과 화장품, 장신구 등을 보관한 함

그리고 침상寢牀 근처로 크고 단단한 탁자卓子가 있고 그 위에 각종 궤짝櫃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불교 경전이나 옷을 보관하는 큰 상자箱子부터 화장품, 장신구를 보관하는 작은 함函까지 다양했지요. 고려高麗는 물론 조선朝鮮 때까지도 장롱欌籠이 없어 옷이나 각종 입을 것을 궤櫃에 보관했지요.

탁자 위에 작은 함을 올리고, 그 아래나 주변에 농, 반닫이 등 큰 보관용 가구를 배치했다
탁자 위에 작은 함을 올리고, 그 아래나 주변에 농, 반닫이 등 큰 보관용 가구를 배치했다

대신에 앞면에서 위 아래로 여는 반닫이나 옆으로 여는 농籠이 있었습니다. 큰 농籠은 주로 이불 등 부피가 큰 걸 보관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작은 농籠이나 반닫이는 지금의 캐리어처럼 어디로 이동할 때 개인 물품을 담아 보관하는 이동형 함이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朝鮮 대의 가구에 탁자卓子와 의자倚子만 추가된 모습이었습니다.

 

 

 

  • 책을 읽는 탁자와 의자

송대의 탁자와 주변 가구
송대의 탁자와 주변 가구

화려한 불교 문화가 융성한 당唐에 이어 우아한 유학 문화가 꽃피운 송宋 시기는 중화 문화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실내 가구도 아름다웠지요. 송宋의 사대부는 옻나무로 주칠朱漆이나 흑칠黑漆한 탁자卓子를 중심으로 여러 가구가 배치되어 업무를 봤습니다. 그리고 탁자卓子 위에는 문방사우를 비롯해 각종 도자기나 작은 난초, 수석을 올려 우아하게 장식했지요. 이 문화를 고려高麗도 따라했습니다.

독서를 하거나 다도를 하는 용도로 쓰인 경상
독서를 하거나 다도를 하는 용도로 쓰인 경상

탁자卓子야 종류가 워낙 많아 특정하기 어렵지만 현대에 쓰이는 탁자卓子와 비슷했습니다. 다만 옻칠을 했다는 차이점이 있겠지요. 탁자卓子 중에서 많이 쓰인 탁자卓子는 경상經床이 있습니다. 좌우에 코가 올라간 경상經床은 책을 읽는 용도로 쓰인 탁자卓子입니다. 고려高麗 때 승려들은 불경을 읽고 유학자들은 유학 경전을 읽는 용도로 쓰였지요. 그 외에도 그림을 그리거나 다도를 즐기는 등 우아한 취미를 향유하는 가구였습니다. 경상經床은 고려高麗 때는 성인 남성 키의 절반 정도로 높았지만, 조선朝鮮 때는 검소한 생활과 좌식坐式을 강조해 높이가 낮아졌습니다.

의자와 왜탑

탁자卓子가 있다면 의자倚子도 있어야지요. 고려高麗 당시 의자는 황실, 귀족, 승려가 애용하는 가구였습니다. 그래서 고려高麗 때 승려 초상화를 보면 의자倚子에 앉아 있지요. 의자倚子는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의자倚子가 있고 그 앞에 작은 왜탑矮榻이 있습니다. 왜탑矮榻은 신발을 벗고 버선을 신은 채 발을 올려놓아 편안히 있으라는 발 거치대로 쓰였지요.

이동할 때 앉던 교의
이동할 때 앉던 교의

저 당시 의자倚子는 단단한 참나무 등으로 만들었기에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큰 탁자卓子 앞에 두고 앉는 용도로 사용했지요. 대신 야외에 간이로 의자倚子를 둬 앉을 때는 걸상이라는 접이식 의자倚子를 두고 다니며 앉았습니다. 이 걸상 종류로 교의交倚와 호상胡床이 있었습니다. 실내외에 돌아다니며 바깥 업무를 하는 귀족이나 바깥에서 설법하던 승려들은 주로 교의交倚라는 의자를 쓰고 다녔지요. 주변에 하인이 어깨에 짊어지고 함께 이동하다 적당한 곳에 교의交倚를 설치하면 그 위에 앉았습니다.

X자로 교차하는 의자 호상
X자로 교차하는 의자 호상

교의交倚보다 더 단순한 이동식 의자 호상胡床은 오랑캐의 의자라는 뜻에 맞게 활발하게 이동하는 북방 유목 민족이 말을 타고 다니다 밥을 조리하고 천막을 칠 때 쓰던 간이 의자倚子에서 유래된 겁니다. 때문에 격렬한 전투가 있는 전쟁터에서 장군이 앉아 회의하는 등 더 활발한 상황에 주로 쓰였지요. 이게 일본에 전해져 된 것이 쇼기床几입니다. 여러 세력이 싸우는 전장을 지휘하는 다이묘가 앉아 부채로 전장을 보고는 명령을 내릴 때 쓰던 의자倚子였지요.

청자투각고리문 의자
청자투각고리문 의자

그 외에도 청자靑瓷를 구워 만든 의자倚子도 있습니다. 당연히 제일 귀하고 무거운 의자倚子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나 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전각에 배치했지요. 청자靑瓷를 사랑한 귀족의 삶이 보이는 가구입니다.

문방사우 등을 보관한 문갑
문방사우 등을 보관한 문갑

탁자卓子 옆에는 장식품을 따로 두는 격자탁자格子卓子나, 문방사우를 안에 보관하고 위에는 도자기로 장식하는 문갑文匣을 둬 수납과 장식 두마리의 토끼를 잡았습니다. 특히 문갑文匣은 나전칠기螺鈿漆器로 만들어 화려하고 수놓았고, 그 안에 책과 문서, 문방사우 등 업무용 물품을 보관했습니다. 그래서 탁자卓子 바로 옆에 둬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있게 만들었지요.

족자와 서축

그리고 흰 벽에 아무것도 없으면 심심하니 여러 족자簇子와 서축書軸을 달아 구경하는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족자簇子는 세로로 긴 비단에 그림을 붙여 벽에 걸어두는 장식품으로 고려高麗는 불교 사회였기에 족자簇子로 주로 불교 탱화를 그려넣어 전시했지요. 서축書軸은 족자簇子와 비슷하지만 주로 서예를 걸어둔 장식품으로, 송宋의 서예를 동경한 유학자들이 주로 집안에 전시했습니다.

 

 

 

  • 불을 밝힌 등잔燈盞과 향기를 채운 향로香爐

고려 청동 촛대, 조선후기 사찰 용등초, 조선 옥등잔, 조선후기 황동 등잔대

그리고 밤을 밝히기 위해 불을 켜야 하죠. 고려高麗 대에는 실내에 촛대燭臺와 등잔燈盞을 설치해 밤에 불을 켰습니다. 고려 대 초燭는 무명 천을 돌돌 만 뒤 기름을 듬뿍 먹여 만든 것으로 이를 촛대燭臺 윗부분에 꽂고 불을 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촛대燭臺를 손에 들고 다니며 어두운 밤 실내를 돌아다녔지요. 또다른 조명기구는 등잔燈盞이 있습니다. 각종 식물을 짜 만든 기름을 담은 등잔燈盞에 불을 붙여 사용했으며 등잔대燈盞臺에 달아 실내 한구석에 둬 불을 밝혔지요. 고려高麗 때에는 옥玉을 깍아 만든 옥등잔玉燈盞을 귀하게 여겨 황실과 승려, 귀족이 애용했습니다.

등잔을 넣은 제등

촛대燭臺나 등잔대燈盞臺를 손으로 들고 다녀도 되긴 했지만 일단 손이 뜨겁고 실수하면 엎에 옷에 불이 붙을 수 있었습니다. 실내에 가만히 둔다 해도 어쨋든 엎어버리면 순식간에 바닥부터 불에 타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등잔대燈盞臺를 넣고 얇은 종이 사이로 불빛이 세어 나오는 제등提燈을 사용했지요. 제등提燈은 엎더라도 제등提燈부터 불타 다른 물품에 불이 번지는 걸 잠깐이나마 막아주고, 등잔대燈盞臺 하나만 있는 것보다 빛을 모아 발산하기에 더 환했습니다.

고려 때 연회에 사용한 화려한 강사초롱

무엇보다도 심미적으로 아름다워 장식품으로 좋았지요. 때문에 실내에서 제등提燈을 사용했고, 외출할 때나 외부에는 작은 제등提燈인 강사초롱絳紗燭籠을 이용했습니다. 궁중 연회나 연등회 등에 주로 사용한 초롱燭籠으로 붉은 비단 안에 등잔燈盞을 넣은 뒤 비단 주변을 각종 화려한 장신구와 쪽비단으로 꾸민 초롱燭籠입니다. 귀족 정도라면 강사초롱絳紗燭籠을 집 기둥이나 들고 다니는데 사용했겠지요. 이 강사초롱絳紗燭籠은 조선朝鮮 때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로 다른 장식을 다 빼고 붉은 비단 위에 푸른 비단 하나만 추가하는 식으로 청사초롱靑紗燭籠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닥에 설치한 대형 청동 향로
바닥에 설치한 대형 청동 향로

초롱燭籠이 빛을 담당했다면 향로香爐는 향기를 담당했습니다. 아무리 저택이다 하더라도 여름이면 쿱쿱한 냄새가 올라오는 등 불쾌한 냄새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냄새를 없애고 향기를 더하기 위해 향로香爐를 설치해 그 위에 향香을 피웠습니다. 이는 향香을 통한 정화를 중시한 불교의 영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귀족은 방 안 가운데 넓은 곳에 큰 청동 향로香爐를 두고 백단향이나 연꽃향 등 귀한 향香을 피워 집안에 좋은 냄새가 나게 했습니다.

청자로 만든 구룡형 뚜껑 향로
청자로 만든 구룡형 뚜껑 향로

그리고 탁자卓子 위에는 청자靑瓷나 황동黃銅으로 만든 작은 향로香爐를 따로 설치해 지금의 인센스처럼 사용했지요. 이 작은 향로香爐는 평상시에는 방 안 공기를 정화하는데 쓰이다 불교 행사 때 부처님께 바치는 공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고려高麗 사람은 집 안에 은은한 빛과 향을 마련했습니다.

 

 

 

  • 방을 따뜻하게 데운 시설들

신라에서 만든 양탄자 화전
신라에서 만든 양탄자 화전

아직까지 잘 안 알려져 있는 사실이 있는데, 한국도 옛날부터 양탄자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신라新羅 때부터 시작해 고려高麗, 조선朝鮮 때 양탄자를 자체 생산했지요. 지금 신라新羅와 조선朝鮮의 양탄자는 일본에 유물로 있습니다. 고려高麗 것만 기가 막히게 없는데 다행히 삼도부三都賦라는 고려高麗 대 문인 기록에서 귀족들이 방바닥에 양탄자를 깔았다는 기록이 있지요. 양탄자를 고려高麗 때에는 채담彩毯 혹은 모담毛毯라고 불렀습니다. 양과 산양, 염소의 털을 짜 맞춰 만든 바닥 깔개로 황제와 귀족은 자택에 두터운 채담彩毯을 깔아 바닥 한기를 막았습니다.

귀면 청동로
귀면 청동로

그리고 그 위에 화로火爐를 올려 난방을 했습니다. 고려高麗 때는 주로 집 가운데에 청동으로 만든 크고 무거운 화로를 배치해 중앙에서 나온 열을 방 전체에 순환시켰습니다. 대표적인 유물이 귀면 청동로로 도깨비 입 부분이 뚫려 있어 그 안으로 바람을 넣는 풍로風爐나 위에 큰 도자기를 올려놓고 차를 끓이는 다로茶爐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지요. 평상시에는 안에 숯불을 듬뿍 넣어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고 필요할 때 따뜻한 차를 데워 마셨을 겁니다. 이런 대체 난방 수단이 있었기에 고려高麗 귀족은 쪽구들을 서민 혹은 노인이나 쓰는 난방 도구로 생각해 이용하기를 꺼려했습니다.

 

 

 

  • 부뚜막 없는 부엌

다리 없는 솥인 철부와 다리 셋 달린 철정
다리 없는 솥인 철부와 다리 셋 달린 철정

고려高麗 때 부엌은 우리가 아는 조선朝鮮 모습과 달랐습니다. 특히 귀족 집이라면 쪽구들이 천시되었기에 부뚜막에 큰 솥이 있는 형태가 아니었지요. 대신 땅바닥에 화덕을 놓고 그 위에 철부鐵釜와 철정鐵鼎를 올려 요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철부鐵釜는 다리 없는 솥으로 주로 국이나 죽 등 무거운 요리를 대량으로 할 때 쓰였고, 철정鐵鼎은 밥이나 볶음 요리, 튀김 등 반찬거리를 조리할 때 쓰였습니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서 묘사된 조선 전기 요리 모습

위 그림은 조선전기에 그려진 연회 잔치 준비 모습인데, 보시면 부뚜막 솥이 아닌 바깥에 화덕을 파고 큰 돌을 올린 뒤 그 위에 솥을 둬 요리하지요. 고려高麗 때도 이렇게 화덕에 요리하는 모습이 상류층에서는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족 저택이나 승려 사찰, 황제 궁궐에서는 식재료를 보관한 창고 옆 작은 텅 빈 실내 공간에 화덕을 설치하고 철부鐵釜와 철정鐵鼎으로 요리했지요. 이 때 화재 방지를 위해 모래나 전돌을 깐 바닥 위에 솥을 쌓아 불을 붙이고는 요리했습니다.

백정과 중인은 부뚜막 위에 큰 솥을 둬 요리하고 옆 쪽구들에서 따뜻하게 잠잤다
백정과 중인은 부뚜막 위에 큰 솥을 둬 요리하고 옆 쪽구들에서 따뜻하게 잠잤다

물론 이는 상류층 모습이고, 여러 번 언급했지만 백정과 중인은 쪽구들에서 취사와 취침 모두 해결했습니다. 쪽구들의 시작점인 부뚜막에 나무를 넣어 불을 떼우고 그 위에 철부鐵釜를 설치해 밥과 국, 반찬 다 했지요. 그리고는 옆의 쪽구들로 가 잠을 잤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귀족과 백정의 서로 다른 취사 방법을 언급하기도 했지요.

출토된 고려 항아리
출토된 고려 항아리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고려高麗 때도 항아리에 음식물을 저장했습니다. 고기는 물론 각종 채소 등 손질하지 않은 식재료는 옹기에 담았지요. 또한 된장과 간장, 액젓 등 장醬은 매병煤病이나 큰 옹기에 담아 일 년을 두고 두고 사용했습니다. 그 외에 식수나 음료, 술 등을 보관하는 독으로 사용했지요. 보통 이런 보관용 항아리는 슴슴한 토기吐器로 만들었습니다.

철화청자 물항아리
철화청자 물항아리

그 중 내 바로 옆자리에 두고 쓸 항아리는 청자靑瓷로 꾸며 활용했지요. 보통 마시는 식수를 보관하거나 간단하게 세수할 때 쓸 물, 혹은 글을 쓰기 전 먹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을 담는 물항아리를 청자로 만들었습니다. 귀족과 승려는 청자靑瓷를 이용했고, 중인이나 잘 사는 백정, 노비는 더 저렴한 철화청자鐵畫靑磁로 만든 항아리를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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