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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식주衣食住

[의식주衣食住 :주거 가옥] 저택의 구조와 공간 구성

by 롱카이 2026.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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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실된 당唐과 송宋의 저택

안록산의 난 등 대규모 전란으로 소멸한 당 문화
안록산의 난 등 대규모 전란으로 소멸한 당의 저택

참 비참하게도 고려高麗의 저택 중 현존하는 저택은 없습니다. 그러면 보통은 해외 사례로 고려高麗 저택의 모습을 역추적하지요. 이 해외 사례로 딱 좋은 것이 선진 문화를 개발하고 전파한 원조국, 즉 중화의 사례입니다. 문제는 중화에도 고려高麗 귀족이 따라했을 문화 원형이 사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권세가라지만 결국은 황실이 아닌 개인일 뿐인 귀족의 집의 경우는 더더욱 심하지요. 고려高麗가 참고했을 당唐과 송宋의 저택은 모두 중화에 불어닥친 거대한 전란으로 싸그리 사라지고, 지금은 명明과 청淸의 저택만이 남아있습니다.

남송 별궁 덕수궁 복원 디오리마
남송 별궁 덕수궁 복원 디오리마

천하질서를 확립하고 세계적인 선진국 지위를 유지한 당唐은 가장 화려한 문화를 이룩하고 주변국에 성공적으로 전파했으나, 정작 본국은 안록산의 난과 황소의 난 등 대규모 전란으로 그 훌륭한 문화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이어 등장한 송宋은 당唐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기록하고 보관하고 주변국에 전파하며 자국 문화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재수없게도 풀 한포기도 싸그리 불태워버리는 미친 나라 몽골의 침입을 당해 수많은 기록이 사라졌지요.

청명상하도에서 묘사한 저택
청명상하도에서 묘사한 저택

그래도 당대唐代의 교훈이 의미없던 건 아니라서 송대宋代 저택과 일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다양한 그림이 지금 남아있습니다. 북송北宋의 수도 카이펑開峯의 일상을 큰 화폭 안에 전부 담아낸 중국의 걸작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가 남아있어 송대宋代 평민들의 생활상은 물론 상류층인 사대부들의 일상과 저택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경산수도 일부
사경산수도 일부

또한 사대부들이 자신의 일상을 그림으로 남기는 아집도雅集圖라는 풍속화가 송대宋代에 유행하며 당시 저택이나 가옥의 모습을 많이 남겼습니다. 마치 조선朝鮮 때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걸출한 화가들이 풍속화를 남겨 민중 생활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유학儒學의 광적인 기록 중독이 후사에 이렇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아쉽지만 그래도 아집도 같은 그림을 참고하며 송宋 문화를 받은 고려高麗 저택의 생김새와 구조를 추적하려고 합니다.
 
 
 

  • 일본에 남아있는 당唐과 송宋의 모습, 카라후唐様

당풍으로 지은 후지와라노 요시미 저택

또한 다행히도 현존하는 당과 송의 저택 모습을 간직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이죠. 나라奈良에서 헤이안平安 시기에 중국 문화를 수용한 일본은 이를 카라후唐様라 부르며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유지했습니다. 헤이안平安 때 천황의 외척으로써 천황도 무섭지 않은 권력을 지닌 후지와라노 가문은 후지와라노 요시미 저택을 카라후唐様 양식으로 지으며 위엄을 펼쳤습니다. 이 때는 당풍唐風을 따랐기에 익랑翼廊으로 건물을 연결한 당대唐代 저택 모습이 잘 남아있습니다.

도호쿠지 삼몬
송대 양식으로 지어진 도호쿠지 삼몬

그리고 당唐보다는 적지만 헤이안平安에서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에 이르는 시기에는 송宋과 고려高麗를 통해 가끔 송宋의 문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귀하지만, 도호쿠지東福寺의 삼몬三門과 같이 송대宋代 양식을 간직한 현존하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의 문화가 일본에 잘 남아있죠. 월남은 없냐고요? 한자문화권에서 제일 극심한 전란으로 자국 문화를 제일 많이 깨먹은 나라가 월남입니다. 후 레 왕조家後黎 때 시작한 남북조 내전에 이어 떠이선西山 봉기, 떠이선西山을 잔혹히 진압한 응웬 정권阮朝 삼연속의 내란으로 응웬 왕조阮朝 전 건축물 중에 멀쩡히 남은 게 없습니다. 남은 응웬阮朝 건축물과 문화마저 베트남 전쟁으로 대거 파괴되었지요.
 
 
 

  • 기록과 사례로 유추하는 고려高麗 저택 구조

충주읍성에서 출토된 고려 벽돌

여하튼 이렇게 중국과 일본의 사례로 당시에 한자문화권이 공유한 저택의 모습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 은근 고려高麗 당시 저택과 각종 대규모 건축지 터가 발견되고 있고, 유학儒學 덕분에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글로 묘사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종합해 저택 모습을 살펴보지요.
 
 
 

  • 문과 계단, 담장으로 증명한 귀족 가문의 위상

의성김씨 종택의 정문은 누각으로 되어있다
의성김씨 종택의 정문은 누각으로 되어있다

지금이야 철근콘크리트로 아무렇지 않게 마천루를 짓는 시대여서 건축물의 높이 자체가 건축술과 입주하는 기업, 거주하는 사람의 위엄을 보여주지만 옛날에는 아무리 높이 짓는다해도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종교 시설물 아니면 어짜피 살지도 못하는데 굳이 힘들게 높이 지을 이유도 없었지요. 때문에 옛날에 잘 사는 사람들은 입장하는 입구부터 웅장하게 지어 손님에게 은근한 압도감을 줬습니다. 검소를 강조한 조선朝鮮 때도 왕의 권위가 약해진 세도정치 시기에 세도가문이 집과 문을 크게 지어 자신들의 권세를 조선팔도에 자랑했지요.

권위가 높은 귀족일수록 정문을 높은 누각으로 꾸며 위용을 알렸을 것이다
권위가 높은 귀족일수록 정문을 높은 누각으로 꾸며 위용을 알렸을 것이다

이는 고려高麗 때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고려사高麗史 등 기록에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가문의 집은 정문부터 크고 웅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문에 거대하고 화려한 누각樓閣을 세워 황제조차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누각樓閣은 여름에는 귀족이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놀거나 손님과 잡담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아마 평소에는 시종이나 사병이 위에서 밖을 바라보며 침입자가 있는지 감시하는 용도였을 겁니다.

계단 위에 문이 세워져 있는 형태로 삼문을 표현했을 것이다
계단 위에 문이 세워져 있는 형태로 위계를 표현했다

여튼 큰 정문에 기가 죽은 체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이 나오고 그 위에 또 다른 문이 나옵니다. 이렇게 여러 문이 있는 건 사찰에서 시작해 집에 뿌리내린 문화인데 다진多進이라고 부릅니다. 다진多進은 신분을 상징하는 또다른 장치인데, 황제는 5개의 문을 가질 수 있고, 제후(왕)은 3개의 문을 가질 수 있으니 고려高麗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귀족들은 3개의 문을 세워 권세를 증명했습니다. 또한 한자문화권에서는 지면의 열기와 한기를 피하기 위해 건축물의 기단基壇을 높이 쌓았는데, 고려高麗 대에는 건축물 뿐만 아니라 아예 땅 자체에 기단을 세워 계단식으로 만든 뒤, 3개의 문 앞에 계단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강제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게 하며 집주인의 위계를 보여줬지요.

행랑으로 이어진 계단식 집 구조를 가진 의성김씨종택
행랑으로 이어진 계단식 집 구조를 가진 의성김씨종택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와중에 주변을 보면 삼문三門 주변은 담장이어도 좀만 벗어나면 중층行廊의 행랑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집안 사람들은 힘들게 땡볕에서 계단을 타지 않고 행랑을 통해 집의 여러 구역을 이동할 수 있었지요. 당唐에서 익랑翼廊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행랑行廊의 역할이 딱 그거였습니다. 이런 중층 행랑行廊으로 간편하게 집구석을 이동하는 방식은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朝鮮後期에 지어진 의성김씨종택이지요. 산비탈의 경사에 맞춰 집을 계단식으로 설계한 뒤 중층 행랑行廊으로 이동할 수 있게 지어진 고택입니다. 조선후기朝鮮後期가 이 정도인데 고려高麗 때는 더했지요.

집 담장을 성벽으로 두른 중국 명대 부호 왕가대원
집 담장을 성벽으로 두른 중국 명대 부호 왕쟈다위옌

조선朝鮮에서 왕도 무섭지 않은 가장 강한 세력인 훈구 세력과 세도가문은 궁궐과 비슷한 규모의 저택을 지었다고 하지만 담장은 궁궐보다 작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고려高麗 대 귀족은 말 그대로 황궁과 비슷하거나 더 크게 집을 지었는데, 이 때 담장도 성곽처럼 지었다고 합니다. 대전 상대동의 고려 귀족 저택 유적지에 발견된 바깥 담장의 폭은 2m, 높이도 2-3m로 추정합니다. 진짜로 성곽城郭을 쌓은 것이지요.

명말 청초에 청 가문이 쌓은 황청샹푸
명말 청초에 청 가문이 쌓은 황청샹푸

이는 귀족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생존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고려高麗 대 행정력은 약해 통일된 군대가 아닌 황제 직속 군대와 나머지 지방 향리鄕吏의 군대로 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외부 세력이 침입하거나 내전, 봉기가 발생한다면 군대는 황제와 향리를 보호할 뿐, 나라가 귀족을 보호하지 못했어요. 일례로 몽골이 침공할 때 몽골에 협조적인 강동江東 일대의 향리鄕吏는 군대를 보내지 않고 몽골군을 그대로 통과시키고는 전국토가 불바다되는데도 구경만 했지요. 이렇게 고려高麗 군대는 통일성 없이 각자 알아서 군대를 조직하고, 전란이 발생하면 각자 알아서 처리했기에 귀족은 전란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병을 양성하고 집 담장을 성벽으로 쌓아 스스로를 보호했습니다.

세이난 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물던 오사카 성
세이난 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물던 오사카 성

중국도 비슷하게 혼란기 때 지방 영주나 부호가 집 담장을 성벽으로 두르고는 사병을 모집해 스스로 집을 지켰습니다. 당唐이 붕괴될 때는 지방에 군대를 보유한 절도사들이 저택을 성곽으로 두르고 봉기를 일으켰고, 명청明淸 교체기 때는 지방 부호나 영주들이 저택에 성곽을 쌓고 사병을 모집해 청군의 공격으로부터 집을 직접 보호했습니다. 월남도 제후인 찐 가문과 응웬 가문이 서로 싸우는 내전 시기인 남북조시대 때 찐 가문은 푸쭈찐鄭王府(현대 베트남 문자: Phủ Chúa Trịnh)이라는 저택의 담장을 성벽으로 쌓았다고 합니다. 일본은 세이난 시대 때 쇼군이나 다이묘들이 아예 요새를 지어 생활했지요. 유럽이나 중동과 인도 역시 봉건시대 때 영주들이 각자 저택을 아예 성으로 쌓아 생활했고요. 고려高麗도 비슷하게 귀족은 저택 밖에 성벽이나 높은 담장을 쌓고, 사병을 배치해 스스로를 지켰습니다.

 

 

 

  •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철저히 구분한 구조

건축물마다 용도를 구분하는 한자문화권 저택
건축물마다 용도를 구분하는 한자문화권 저택

우리가 배우기를 한옥은 여러 채의 건축물이 있고, 건축물마다 용도가 다른 것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양반댁이라면 사랑채와 안채가 있고 부속 건축물이 있는 걸로 배우지요. 이는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 월남, 일본이 공유하는 한자문화권의 가옥 형태입니다. 생긴 건 달라도 각각의 용도를 가진 건축물들의 집합이 집家이지요. 당연히 고려高麗 귀족의 저택도 용도를 가진 여러 건축물의 집합체이고, 행랑行廊으로 그 사이를 연결한 형태였습니다.

닛코산 와왕지
닛코산 와왕지

고려高麗 저택 중에 가장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는 내불당內佛堂이었습니다. 불교를 숭상하고 귀족이 불교를 적극적인 후원한 시대라, 귀족 저택 안에 불교 의식을 행하며 집안의 복을 빌거나 승려, 손님에게 차를 내놓으며 따뜻하게 맞이하는 내불당內佛堂이 존재했습니다. 때문에 승려와 손님을 맞이하는 내불당內佛堂을 최대한 크고 화려하게 꾸몄으며 일부 권세가는 아예 내불당內佛堂 구역에 금탑金塔을 세우는 등 어마어마한 사치를 부렸습니다.

중심 전각
안런방유적전시관에서 재현한 당대 중심 전당

허나 내불당內佛堂은 종교적 목적의 건축물입니다. 저택은 절이 아니기 때문에 내불당內佛堂은 결코 중심 건물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저택에는 전당殿堂이라는 시설이 있었습니다. 전당殿堂은 집안 모임이나 회의 또는 여럿 사람을 초대해 연회를 여는 등 귀족 신분으로서 하는 각종 공적 업무를 하는 건축물로 저택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축물이죠. 때문에 귀족은 자신의 권력이 뒷받침할 수 있는 한 전당殿堂을 최대한 크게 만들었지요.

가마쿠라 막부의 정무 중심지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쇼군의 사택 오구라고쇼
가마쿠라 막부의 정무 중심지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쇼군의 사택 오구라고쇼

고려高麗 전기에는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나 황실의 외척인 이자겸 정도는 되야 거대한 전당殿堂을 지을 수 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귀족이라 하더라도 웬만한 권력을 가진 귀족이면 황제 눈치를 봐 전당殿堂을 사랑방舍廊房처럼 작게 만들어 운영했겠지요. 하지만 실질적 권력이 황제에서 무신에게 넘어간 무신정권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피비린내 나는 암투에서 최종 승리한 최씨 가문은 개인 저택에 큰 전당殿堂을 세워 신하를 모아 정무를 보고 회의를 했습니다. 황제가 황궁에서 해야 하는 일을 무신 사택에서 하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죠. 마침 일본도 천황 가문이 끊기자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등장하며 귀족들이 천황이 머무는 헤이안쿄平安宮가 아닌 쇼군 저택에 모여 회의하고 정무를 처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려高麗에서 국정이 황궁이 아닌 사택에서 논의되는 일은 무신정권과 몽골 지배기 때까지 이어졌지요.

안동 임천각처럼 침실 등 사적 공간은 여러 행랑채에 둘러쌓여 있었을 것이다
안동 임청각처럼 침실 등 사적 공간은 여러 행랑채에 둘러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 있다면, 집인데 자고 쉬고 밥을 먹는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죠. 당연히 귀족 저택에 침실과 생활 공간이 따로 존재했습니다. 고려高麗 저택은 주변의 시종이 머물 행랑채行廊砦를 빽빽히 가지고 있으며, 보온과 외부 침입 경보를 위해 작고 은밀한 공간을 침실이나 사적 생활공간으로 마련했습니다. 보통은 계단 중에 가장 높은 부분에 귀족 가문에서 어른의 침실로 이용했고, 높이에 따라 집안 서열 순으로 사적 공간을 가졌지요.

조선 대 격구장을 묘사한 그림
조선 대 격구장을 묘사한 그림

무신정권 이후 심해집니다만, 권력을 잡은 무신은 집 안에 격구장을 둬 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무위자연 편에서 자세히 다룰 겁니다만 격구擊毬는 말 위에 탄 체로 막대기를 이용해 작은 공을 목표 지점에 넣는 경기였습니다. 지금의 폴로와 같지요. 격구擊毬를 잘하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창과 칼, 활을 잘 다루는 정예병이었기에 고려高麗 대에는 군사 훈련의 목적으로 격구擊毬를 자주 열었습니다. 자기 사병을 강하게 양성해야 하는 무신은 더더욱 격구擊毬를 장려했지요.

드라마 [무신]의 격구장 세트장
드라마 [무신]의 격구장 세트장

무신 최우는 주변 민가 100 여 곳을 허물고 격구장擊毬場을 만들어 즐겼는데, 승려 300명이 앉아 식사하며 구경할 수 있을정도로 거대했다고 합니다. 담장 길이만 400보(약 350m)에 달했다고 하니 지금 축구장을 약 10개 합쳐놓은 크기입니다. 저런 대규모 격구장擊毬場이 저택 안에 있는 정도면 저택이 얼마나 큰지 감이 안 올 정도네요.

저택 안에 마련한 정원의 예, 서화원
저택 안에 마련한 정원의 예, 서화원

또한 고려高麗 귀족은 집의 뒤뜰, 즉 산에 제일 가까운 장소나 물이 흐르는 곳에 정원을 세우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자연을 중시하는 도가道家가 널리 퍼졌고, 선진 문화인 송대宋代 양식의 정원이 유행해 너도 나도 따라 정원을 세워 자연을 집 안으로 들였습니다. 고려高麗 대 정원의 자세한 모습은 다른 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 권위를 과시한 화려한 건물 장식

황제도 두렵지 않은 권세가의 저택은 매우 화려했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실권이 넘어간 이후 무신과 권문세족의 전당殿堂이 궁궐 정전正殿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남한에서 발견된 고려高麗 중기 이후 저택 터에서 각종 청기와를 비롯한 화려한 장식품이 나오고요. 그리고 고려도경高麗圖經 등의 기록을 보면 황권이 아직 살아있는 고려高麗 전기에도 귀족 저택은 만만치 않게 화려했을 것 같네요. 그래서 귀족의 저택 구조를 다루는 김에 귀족 저택을 꾸민 화려한 장식들을 볼 겁니다.

청자 난주

고려高麗 문화의 상징은 청자靑瓷입니다. 그리고 이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요. 고려高麗 귀족들은 매병梅甁이나 주전자酒煎子 같은 식기 도구 뿐만 아니라 집 전체를 청자靑瓷로 도배했습니다. 여러 기록에도 하도 많이 나오고 그걸 뒷받침하는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지요. 먼저 기둥을 받치는 난주欄柱 중에 청자靑瓷 난주欄柱가 발견되었습니다. 위 유물은 청자靑瓷치고는 흰 배경에 검은 무늬로 되어있지요. 이런 청자靑瓷는 철가루를 안료로 사용해 철화청자鐵畵靑瓷라고 불립니다. 이 철화청자鐵畵靑瓷 위로 붉은 주칠朱漆이나 옻으로 흑칠黑漆을 한 기둥이 세워지는 것이죠.

벽면을 장식한 청자자판

기둥 사이에 있는 벽도 평범한 흙벽이 아니었습니다. 두꺼운 종이를 발라 시원시원한 당풍唐風 벽을 재현하거나, 송宋처럼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벽돌은 단순한 검은 벽돌이 아닌 청자자판靑瓷瓷板으로 도배했습니다. 벽도 온통 푸른 빛깔에 흰 무늬가 화려하게 얽힌 청자靑瓷로 도배한 것이죠. 멀리서 보면 하나의 미술 작품으로 보였겠습니다. 다만, 바닥에 까는 전돌은 청자靑瓷로 만든 건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기록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오염에 제일 취약한 땅바닥이다보니 검은 전돌로 깔고 깨진 것만 바로바로 교체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청자와
청자와

고려高麗의 건축물하면 빠질 수 없는 청자와靑瓷瓦 역시 귀족들이 애용하는 건축 재료였습니다. 청자靑瓷의 비색翡色이 빛나는 청자와靑瓷瓦는 초록 빛이어서 녹유와綠油瓦라고도 불립니다. 녹유와綠油瓦 외에도 진한 파란색인 청유와靑油瓦, 검은색 기와인데 다른 검은 기와보다 더 진하게 번들번들하게 빛나는 흑유와黑油瓦 등 다양한 색을 가진 기와들이 건축물을 꾸몄지요.

정체를 알기 어려운 기와 위 금박 장식

또한 고려 불화를 보면 지금은 절대 볼 수 없는 신기한 모습의 지붕 장식을 볼 수 있습니다. 기와로 덮은 지붕 위에 무슨 금 타일이 덮여 있는 모습이죠. 이게 뭔지는 모릅니다. 불화에만 발견되는 장식이고 출토된 건 없는데,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불화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실존하는 장식 같거든요. 추정으로는 금동 아련와金銅兒蓮瓦 같은 기와이지 않을까 싶어요. 조선 전기朝鮮前期에는 조갯가루를 섞어 표면이 매끈한 기와를 아련와兒蓮瓦라고 부르며 궁궐 지붕 장식으로 쓰네 마네 하며 왕과 신하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오거든요. 문제는 조선의 아련와兒蓮瓦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지금 나온 기록 상 그나마 비슷해서 아련와兒蓮瓦로 추정해봅니다.

일본에 남아있는 현어 장식

그리고 팔작지붕이나 맞배지붕의 옆면을 보면 ㅅ자로 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 ㅅ의 꼭짓점 부분에는 아래로 툭 튀어나온 장식이 있는데 이를 현어懸魚라고 합니다. 두 지붕을 연결한 뒤 박공을 박고는 지지하기 위해 설치된 구조물로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며 물에 사는 물고기 모양으로 조각해 현어懸魚라 불렸습니다. 현어懸魚 자체는 한대漢代에 등장했지만, 금속 물고기 모양으로 장식한 것은 당대唐代에 유행한 것입니다. 고려高麗와 대월大越 그리고 일본日本은 이 현어를 받아들여 집을 꾸몄고, 지금은 일본에 현어懸魚가 남아있지요. 한국은 임진왜란 이후 현어懸魚 대신 지네철이라는 철판으로 박공하는 형태로 바뀌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지요.

금동 처마 장식
금동 처마 장식

금동으로 반짝 빛나는 현어懸魚와 함께 마루나 처마에 세우는 금동 장식도 발달했습니다. 또한 큰 처마 아래에 풍탁風鐸이라는 작은 금속 종을 달아 화룡정점을 찍었지요. 이런 건축 장식은 추후 [종교 사회 : 불교와 승려] 사찰 편에서 자세히 다룰 겁니다. 아무리 귀족 저택이 화려하다 하더라도 당시 화려함의 끝판왕은 사찰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궁궐의 화초장

고려 후기高麗後期에 이르러서는 담장을 화려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사高麗史에 장순룡이라는 무슬림(이슬람을 믿는 사람)이 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담장에 꽃무늬를 그려 장기장張家牆이라고 소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장기장張家牆은 조선 대로 가면 화초장禾草牆이 되는데 지금 궁궐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담장에 벽돌을 꽃무늬 덩굴처럼 기하학적으로 쌓고 중간 중간에 꽃이나 나무 그림을 그린 담이지요.

화려한 이란의 아라베스크 문양

그래서 이 장기장張家牆이라는 것이 고려 전기高麗前期에도 있던 것인지, 혹은 장순룡 등 무슬림이 도입한 새로운 문화인건지는 아직 모릅니다. 고려高麗 전체를 통들어 기록이 딱 저거 밖에 없고 발견된 유물도 없거든요. 근데 제 생각에는 장기장張家牆이라는 건 아무래도 이란에서 등장해 이슬람의 예술이 된 아라베스크أرابيسك 같아요. 우상숭배 금지로 동물을 그리지 못하는 이슬람은 대신 꽃무늬나 담장 덩굴, 꾸란 글귀를 벽에 적었는데 이게 시간이 흐르며 이란을 중심으로 터키석과 루비 등 각종 보석으로 치장해 화려하고 기하학적으로 발전하거든요. 게다가 고려 후기高麗後期면 이란 일대를 지배한 몽골계 국가 일 칸국이 전에 몽골제국이 파괴한 이슬람 예술을 부흥시킨 시기라 저런 아라베스크أرابيسك가 파괴에서 부활했습니다. 그 아라베스크أرابيسك를 무슬림이 고려高麗에 그대로 구현한 걸 보고 여럿 고려 귀족이나 사대부들이 보고 신기하게 여겨 비슷하게 따라한 것이 화초장禾草牆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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