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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식주衣食住

[의식주衣食住 : 주거 가옥] 백정들의 집

by 롱카이 2026.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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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도경高麗圖經이 남긴 고려高麗의 현실

수도 개경에도 대부분을 차지한 수혈주거
수도 개경에도 대부분을 차지한 수혈주거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여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비바람을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고려도경 제3권 성읍조 민가]


송宋의 사신 서긍은 고려高麗의 수도 개경開京에서 황궁으로 가는 길에 옆 모습을 보고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저 기록은 무려 황궁의 정문인 승평문昇平門으로 가는 길에 주변을 둘러보며 남긴 글입니다. 즉, 황궁 바로 옆의 풍경이지요. 고려高麗의 핵심지인 황궁 근처인데도 기록에 따르면 제대로 된 집이 아닌 막 지은 집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려高麗 정부도 이를 부끄럽게 여겼는지, 높은 담장을 세워 모습을 가리려고 했지만, 산세가 험한 개경開京 지리 특성 상 저렇게 다 보였다는 것이지요.

울주 연자도 고려 주거 유적
울주 연자도 고려 주거 유적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묘사한 기록만 보면 그래서 황궁 주변 집이 어떤 집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집의 크기를 자세히 묘사한 기록과 한국에서 출토되는 각종 고려高麗 백정 가옥 유적을 보고 어떤 집인지 짐작을 할 수 있지요. 국내에는 울주 연자도, 울산 교동리 수남 유적지구, 안성시 만정리 유적, 대구 읍내동 및 성주 예산리 유적 등 여러 곳에서 주거 가옥 유적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신분의 주거 형태가 발견되고 연구되었는데, 여기서는 가난하거나 평범한 백정의 집을 살펴보죠.
 
 
 

  • 뼈저리게 가난한 백정의 움집

지붕 뿐만 아니라 벽도 짚이었던 수혈주거

가난한 백정은 땅을 파고 2개에서 4개의 기둥을 땅에 박고 그 기둥 사이에 서까래를 친 뒤, 짚을 주변으로 둘렀습니다. 네, 움막이죠. 이런 주거 형태를 수혈주거竪穴住居라고 부릅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절에 등장한 집 형태로 건설비용이 매우 저렴해 고려高麗를 넘어 조선朝鮮은 물론 한국전쟁 때까지도 있었지요. 가난한 백정들의 집으로 지금의 판자집과 비슷한 개념의 집입니다.

수혈주거 내부 (이미지는 백제 수혈주거)

수혈주거竪穴住居와 우리가 흔히 아는 초가집의 차이는 벽면입니다. 초가집은 황토나 종이, 그것도 없다면 나무로 벽을 만들어 비바람을 막아주지요. 하지만 수혈주거竪穴住居는 기둥과 서까래를 제외하면 모두 나풀거리는 지푸라기입니다. 벽이 짚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이 벽을 뚫고 내부로 들어가고, 비가 내리면 빗방울이 집 안으로 세고 눈이 내리면 차갑고 습한 냉기가 그대로 갇히는 집이었습니다. 추가로 땅의 열기와 냉기, 그리고 습함이 그대로 전해졌지요. 추운 겨울에는 정말 살기 힘든 집이었습니다.

멍석으로 바닥을 깔고 이부자리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멍석으로 바닥을 깔고 이부자리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수혈주거竪穴住居는 빈민들의 집이었지만,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고려高麗에 이르러 대부분의 백정이 수혈주거竪穴住居에 살았습니다. 그 말은 백정들이 살기 진짜 힘든 시대였다는 것이지요. 뼈빠지게 농사를 짓고도 내 몸을 편히 쉬지 못하는 집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찌저찌 살아야 하긴 하니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냉기를 막기 위해 두꺼운 멍석을 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또 멍석을 깔아 이부자리로 사용하는 등 생존을 위해 분투했습니다.
 
 
 

  • 형편이 나은 사람들의 초가집과 쪽구들

초가집은 꽤 값어치가 나가는 가옥이었다
초가집은 꽤 값어치가 나가는 가옥이었다

고려高麗 때 대부분의 백정이 땅을 파고 기어 들어간 수혈주거竪穴住居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형편이 나은 백정이나 중간 계층이었던 중인中人은 더 나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땅 위에 돌과 흙을 추가로 쌓아 땅의 냉기로부터 멀어진 터 위에 흙벽을 세운 뒤 지푸라기로 지붕을 덮는 초가집에 살았지요. 고려高麗 때까지만 해도 초가집은 꽤나 비싼 집으로 먼 훗날 조선 중기 정도는 되야 모든 백성들이 초가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쪽구들 모습
쪽구들 모습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직접 오는 살인적인 강추위를 버티기 위해 집 한 켠에 쪽구들을 만들고는 취사와 난방을 해결했습니다. 먼저 가마솥이 있는 화덕 옆에 뜨거운 공기가 이동할 공간을 만들고 그 위를 황토로 덮어 열기를 위로 전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불을 떼며 나오는 열기가 공간을 따라 이동하며 황토를 뜨겁게 데우고 굴뚝을 통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루에 밥을 두 번 먹으려고 불을 떼워 음식을 하는 동시에 뜨뜻한 황토 바닥을 만들어 그 위에서 따뜻하게 잠을 청했지요. 이걸 쪽구들이라고 부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온돌의 초기 형태입니다.

여진족, 만주족이 이용하며 청대에 중국에 퍼진 훠캉
여진족, 만주족이 이용하며 청대에 중국에 퍼진 훠캉

이 쪽구들은 옥저沃沮에서 시작해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에 널리 쓰였습니다. 고려高麗 역시 발해渤海의 쪽구들 문화를 간직해 상류층부터 백정까지 형편이 된다면 집안 어딘가에 쪽구들을 만들어 이용했습니다. 또한 시베리아의 칼바람을 똑같이 맞는 만주에 사는 여진족들도 살기 위해 쪽구들을 간직했습니다. 그 여진족들이 세운 금金과 후에 만주족이 세운 청淸이 중화를 삼키며 추운 중국 북부에 쪽구들 문화가 정착되었는데, 그걸 중국어로 훠캉火炕이라 부릅니다.

쪽구들은 좌식 문화를 만들었다
쪽구들은 좌식 문화를 만들었다

이렇듯 만주와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자비없는 시베리아 기단 때문에 따뜻한 쪽구들 위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백정들은 흙으로 만든 침상 위에서 잠을 자고,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리고 기왕 자는 공간으로 쓰는 김에 그 위에서 밥을 먹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좁은 쪽구들 위에 올릴 수 있는 작은 소반小盤이나 탁자卓子 가구를 애용했지요. 음식과 식탁 편에서 고려 사람들이 소반小盤 위에 밥상을 차려 먹은 이유가 저겁니다.

쪽구들을 크게 만들어 좌식과 입식이 공존한 고려 평민 가옥
쪽구들을 크게 만들어 좌식과 입식이 공존한 고려 평민 가옥

형편이 좋을수록 쪽구들 크기를 크게 만들어 앉아서 생활하는 반경을 넓혔습니다. 때문에 고려高麗 대 초가집은 좌식坐式 생활하는 생활 공간과 입식立式 생활하는 부엌 두 공간이 공존했지요. 이 생활 모습은 조선 전기朝鮮前期, 즉 소빙하기가 전세계를 덮치기 전까지 쭉 이어졌습니다.

산간 지방에서 사용한 코굴
산간 지방에서 사용한 코굴

더 추운 강원도와 평안도 일대에서는 쪽구들만으로는 부족해 또다른 난방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코굴이라는 도구로 벽난로이지요. 쪽구들의 간접적인 열 전달로는 따뜻하지 않아 아예 불의 열기를 직접 받는 걸 선택했습니다. 방 한구석에 진흙으로 굴을 만든 뒤 입구를 뚫어 불을 피웠지요. 그래서 매서운 눈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코굴 안에서 피는 불의 열기로 잠을 청하고 방 안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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