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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식주衣食住

[의식주衣食住 : 주거 가옥] 저택의 실내

by 롱카이 2026.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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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돌을 깐 바닥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 고려高麗 귀족

월남처럼 바닥에 전돌을 깔고 입식 생활을 한 고려
월남처럼 바닥에 전돌을 깔고 입식 생활을 한 고려

지금 우리는 좌식坐式 생활에 익숙합니다. 21세기 아파트에 사는 우리는 의자 위에 앉아 책상 위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등 입식立式 생활을 하고 있지만, 바닥에 온돌 보일러가 있고 집 안에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걸 무례로 생각하고 있지요. 이는 여전히 좌식坐式 중심 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하지만 고려高麗, 그리고 소빙하기 전 조선朝鮮까지만 해도 잘 사는 상류층은 입식立式 생활을 고수했습니다. 지금의 중국, 월남, 유럽, 미국처럼 집 안에 신발을 신고 돌아다녔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생활은 입식이었다

이것도 중화 문화의 영향인가 싶지만, 그건 아닙니다. 우리 한민족도 본래 입식立式 생활을 하던 민족입니다.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가 막 등장할 때도 집 안에 전돌을 깔고 신발을 신은 체 돌아다녔습니다. 오히려 중국이 좌식坐式에서 입식立式으로 바뀐 경우입니다. 한대漢代까지만 해도 상류층은 물론 평민들도 집 안에 깔개를 두고 앉아 생활했으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때도 앉아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말을 타고 다니는 선비족이 건국한 당唐부터 입식立式으로 바뀌었지요. 월남도 비슷하게 처음에는 뱀과 곤충을 피해 건물을 높이 지은 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앉는 좌식이었다가 리 왕조李朝 때부터 기단과 전돌을 깔면서 입식立式으로 바뀌었습니다.

 

 

 

  • 일층과 이층 공간을 분리한 실내

중층 행랑으로 방을 연결한 조선 가옥
중층 행랑으로 방을 연결한 조선 가옥

이렇게 고려高麗 당시 귀족은 전돌을 깐 일층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며 공적 업무를 보거나 가족 구성원을 만나는 등의 일상을 보냈지만, 사적 공간은 이층에 있는 작은 방에 마련했습니다. 저택은 중층의 행랑行廊이 큰 건물을 연결하는 구조였기에 일층 위주인 큰 건물에서 공적 업무를 보고, 행랑行廊의 이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지요. 복층 행랑行廊은 아무래도 연결하는 부속 건물에 중층으로 되어 있다보니 무게를 줄이기 위해 나무 바닥에 협소한 공간으로 지어졌습니다. 마치 다락방처럼 말이죠.

월남에 남아 있는 복층 가옥처럼 사다리로 여러 층을 오갔을 고려 저택
월남에 남아 있는 복층 가옥처럼 사다리로 여러 층을 오갔을 고려 저택

굳이 이층 행랑行廊이 필요했을까 싶지만 행랑방行廊房의 역할은 많았습니다. 다른 건물로 이동하는 와중 쉬는 공간을 겸하고, 바닥의 냉기와 열기를 피해 생활하는 공간으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특히 겨울이면 전돌이 차가워져 발이 시려워지니, 아예 좁고 따뜻한 이층으로 올라가 차갑지 않은 나무 바닥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층으로 올라갈 때는 당연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지요. 지금 월남에 일층은 전돌로 깔고 이층을 나무 바닥으로 깐 집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고려高麗 저택의 실내도 월남의 저택과 비슷하게 생겼을거에요.

 

 

 

  • 중요한 냉방과 난방

겨울이면 시베리아의 자비 없는 폭풍이 한반도를 덮친다
겨울이면 시베리아의 자비 없는 폭풍이 한반도를 덮친다

사람이 사는 집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이죠.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냉방이,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난방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반도는 여름이면 뜨겁고 습한 공기가 대지를 푹푹 찌는 사우나로 만들어버리고, 겨울이면 북극보다 더 추운 시베리아에서 날라오는 한파가 사정없이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극과 극의 기후를 선사합니다. 한반도는 더위의 지옥과 추위의 지옥을 일년 안에 모두 경험하는 미친 지역입니다. 때문에 모든 걸 충족하려면 극상의 냉난방 기술이 필요하지요.

여름에 햇빛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발

다행히 고려高麗 정도면 한반도의 극단적인 기후에 대처하는 노하우가 쌓인 시기입니다. 먼저 냉방부터 어떻게 해결했는지 보지요. 귀족 저택은 가장 높아 지면에서 가장 떨어진 안채 인근에 양청凉廳이라 불리는 큰 대청마루를 마련했습니다. 덕분에 지면의 열기가 수많은 기단을 거쳐 뚫고 올라가려다 포기하고 나가떨어지며 안채 바닥은 상대적으로 시원했습니다. 이 안채나 근처에 통나무로 만든 양청凉廳을 설치하고 주변을 다 뚫어 통풍이 잘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마에는 대나무 발을 설치해 바람은 통하되 뜨거운 햇빛이 양청에 드리우지 않도록 막았지요.

여름이면 대청마루나 누각에서 휴식을 취했다
여름이면 대청마루나 누각에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돈이 많아 뭐든지 할 수 있는 귀족은 양청凉廳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큰 정자亭子나 누각樓閣을 세워 바람이 아주 잘 통하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지요. 그래서 그곳에서 손님을 초대하거나 혼자 드러누워 살살 부는 산들바람을 맞이하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아주 안락한 삶이었지요.

대나무와 옻칠한 나무로 시원하게 만든 좌탑
대나무와 옻칠한 나무로 시원하게 만든 좌탑

바닥에 그냥 눕기도 했지만 입식立式 문화 탓에 바닥에 벌렁 눕는 건 비위생적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솔솔 부는 공간에 좌탑坐榻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누워 휴식을 취했지요. 좌탑坐榻은 여름에 잠깐 쉬거나 아예 밤에 잠을 자는 용도로 사용한 가구이므로 대나무나 옻칠한 통나무로 시원하게 만들어 여름 무더위를 날리게 했습니다.

송대 아집도에 묘사된 좌탑 위 휴식
송대 아집도에 묘사된 좌탑 위 휴식

위 그림은 송宋에서 그린 그림인데, 선비가 좌탑坐榻 위에서 팔자 좋게 졸고 있지요. 고려高麗 귀족도 여름이면 딱 저랬을 겁니다. 귀족이나 신진사대부들이 쓴 시를 보면 좌탑坐榻 위에서 즐기는 풍류를 노래한 시가 많지요. 그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시원한 좌탑坐榻 위에서 소반小盤에 올려진 차가운 얼음 간식을 먹으며 몸을 식히거나 꾸벅꾸벅 졸면서 여유로운 낮잠을 청했습니다.

청자 베개
청자 베개

그리고 발이나 목을 받치는 베개는 딱딱하지만 차가운 청자靑瓷로 만든 것을 이용했습니다. 다리야 문제 없겠지만 저걸 어떻게 목에 베고 잠을 청했는지 궁금해지네요. 저걸 항상 베개로 쓴 건 아니고 예전에 사우나 등에서 나무로 만든 목침을 사용한 것처럼 잠깐 자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저걸 항상 베면 목디스크 와서 단명하기 딱 좋죠.

칠불사 아자방처럼 방 안에 쪽구들을 마련했으나, 노인과 병약자가 이용하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여름은 이렇게 시원하게 보낸다면 겨울에는 어떻게 따뜻하게 지냈을까요? 백정이나 중인은 집에 쪽구들을 두고 그 위에서 좌식坐式 생활을 했습니다. 때문에 귀족 저택에도 당연히 쪽구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귀족은 쪽구들을 이용하는 걸 꺼려했습니다. 쪽구들은 병약한 어린이나 노인, 그리고 환자들이나 사용하는 시설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채의 수많은 방 중 어느 방 한켠에 쪽구들을 두고 그 곳에 노인이 쓰게 두고 젊은 귀족은 절대 가지도 않았습니다.

겨울이면 비단이나 모피로 만든 깔개를 덮어 냉기를 막았다
겨울이면 비단이나 모피로 만든 깔개를 덮어 냉기를 막았다

그렇다고 마냥 칼바람을 맞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층 방으로 피신한다 해도 한계가 분명했고, 한겨울에도 공무를 보거나 불공을 드리는 등 일층으로 내려가 업무를 봐야 했지요. 그래서 겨울이면 일층 전돌 위에 두꺼운 깔개를 깔아 냉기를 막았습니다. 비단을 여러 겹 겹쳐 만든 돗자리나 양탄자 등 동물 모피로 만든 바닥재, 그도 아니면 부드러운 왕골을 짜 만든 돗자리를 깔았지요. 그 위로 두꺼운 신발을 신고 돌아다녔습니다.

화로를 방에 둬 따뜻하게 했다
화로를 방에 둬 따뜻하게 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막아도 공기는 차가우니까요. 그래서 큰 방이 아닌 침실 등 개인 공간에서는 따뜻한 바닥재를 깔고 그 위에 놋쇠나 돌로 만든 세발 화로를 올려 숯불로 공기를 데웠습니다. 사람은 화로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손과 얼굴을 녹이고 간식거리를 구워 먹었지요. 참고로 저런 난방 체계 때문에 한겨울에 집에 불이 많이 나기도 했습니다. 화로를 엎거나 숯에서 튄 불똥이 비단이나 모피, 왕골로 만든 깔개를 순식간에 불태우고 이어 방을 불태운 뒤, 행랑行廊을 따라 집 전체를 불태웠지요. 조선 후기朝鮮後期에 행랑行廊이 대거 사라진 이유 중 하나가 저 걷잡을 수 없는 화재 위험성 때문이었습니다.

 

 

 

  • 귀족들의 일상

휘장을 두른 침상
휘장을 두른 침상

그럼 귀족들의 하루 일과를 보지요. 일단 귀족들도 쿨쿨 자다가 일어나 일상을 시작합니다. 귀족은 다리가 길어 지면에서 높이 떠 있는 침상寢狀에서 취침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물론 손님에게 주는 침상寢狀이긴 하지만, 침상 앞에 작은 탁자矮榻가 있어 개인 용품을 맡기는 용도로 사용했지요. 그리고 침상寢狀 바닥에 화려한 비단 깔개를 깔았다고 합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기록대로 무거워 일층에 설치해야 하는 침상寢狀은 아래에 특별히 두꺼운 깔개를 깔아 바닥의 열기와 냉기를 차단했지요. 중국과 월남에 보이는 전통 침상寢狀과 같은 모습입니다.

고려의 베개는 조선 베개와 별 차이 없다
고려의 베개는 조선 베개와 별 차이 없다

고려도경高麗圖經 따르면 베개는 흰 모시로 만들고, 그 안에 다양한 향초를 넣어 두터우면서 푹신하고 향기롭게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금실로 꽃무늬 등 자수 무늬를 세겼다고 하지요. 조선朝鮮에 보이는 원통형이나 사각형 베개를 화려하게 만든 형태입니다. 이 베개를 팔이나 목을 베는 용도로 잘 사용했지요. 청자靑瓷 베개는 여름에 잠깐 낮잠 잘 때나 쓰던 것이고, 주로 이용한 베개는 저런 천 베개였습니다.

옷과 장신구 등을 보관한 나전경함
옷과 장신구 등을 보관한 나전경함

침상寢狀에서 일어난 뒤에는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귀족을 탈의실脫衣室로 안내해 옷을 입혔습니다. 고려高麗 때는 장롱이 아닌 함函 안에 옷을 고이 놓아 보관하고, 이를 꺼내 입었습니다. 당연히 귀족이라면 수많은 함函이 있고 시비들이 알맞은 옷을 꺼내 정성스럽게 입혀줬지요. 함函 중에 귀한 함函이 있었는데, 등비籐篚라는 함函이었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오는 가구인데, 귀족들은 등나무로 만든 등비籐篚에 폐백과 보물을 보관했다고 하네요. 지금은 등비籐篚 유물이 없어 어떻게 생겼을지 모릅니다. 나전함羅甸函 급으로 화려했겠지요.

여럿이서 먹을 때면 독상을 여러 개 둬서 같이 식사했다
여럿이서 먹을 때면 독상을 여러 개 둬서 같이 식사했다

밥 역시 [의식주衣食住 : 음식과 식탁] 편에서 자세히 다뤘지만 탁자卓子 위에 소반小盤을 올린 독상獨床으로 먹었습니다. 단칠丹漆이나 흑칠黑漆한 소반小盤에 담은 밥상을 시종이 탁자卓子 위에 올려놓으면 거기서 식사를 했지요. 온가족이서 모여 식사할 때면 큰 탁자卓子 위에 각자 먹을 소반小盤을 줄지어 놓은 뒤 각자 앉아서 함께 먹었습니다.

 

 

 

  • 목욕하는 전용 욕조과 위생 도구

여주 고달사지 석조
여주 고달사지 석조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고려 사람은 신분의 귀천에 상관하지 않고 모두가 하루에 세번에서 네번 몸을 씻었다고 합니다. 진짜 많이 씻는 편이지요. 그 중 귀족은 사찰에 있는 대형 목욕탕을 이용하거나 집안의 개인 욕탕에서 몸을 씻었다고 하네요. 귀족은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우물 근처에 돌아나 나무로 만든 큰 욕조를 만들어 솥으로 따뜻하게 데운 물을 넣고 편안하게 세신洗身했다고 합니다.

거대한 목욕탕에서 물에 향난을 띄워 목욕한 귀족
거대한 목욕탕에서 물에 향난을 띄워 목욕한 귀족

조선朝鮮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 보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목간통에 따뜻한 물을 부어 목욕을 하지요. 검소를 추구한 조선朝鮮의 사대부 가문은 주로 목간통으로 목욕했습니다. 왕은 돌로 만든 목욕탕을 이용했지만, 그마저 성인 남성 한두명이 들어가는 작은 탕이었지요. 하지만 고려高麗 때는 권세만큼 욕탕 크기를 키웠습니다. 기록에 대형 탕을 마련해 이용했다고 하지요. 현존하는 고려高麗 욕탕 유물이나 유적은 없지만 실로 크고 화려했을 겁니다.

청자 소변기
청자 소변기

그리고 용변 역시 중요하지요. 고려高麗 저택에는 화장실, 즉 뒷간이 없었습니다. 냄새나는 공간을 좋은 집에 만들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지요. 대신 방마다 요강을 둬 급하면 요강으로 용변을 해결하고, 노비가 그걸 알아서 버리는 식으로 처리했습니다. 뭔가 베르사유 궁전 같은 유럽의 저택에서 용변을 처리한 방법과 같지요? 이 때 뒤를 닦는 도구는 희고 고운 명주나 비단을 이용했습니다. 뒷처리에 그 비싼 명주와 비단을 이용할 정도로 사치가 심했지요. 노비나 백정은 짚풀을 꼬아 만든 큰 새끼줄에 엉덩이를 비비는 형태로 뒷처리할 때 귀족은 비단을 아무렇게나 쓰고 버렸습니다.

 

 

 

  • 귀족의 재력을 자랑한 창고

집 구석 구석에 있던 창고
집 구석 구석에 있던 창고

귀족 집안에 있는 창고는 귀족의 권력과 부를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귀족은 복잡하게 얽힌 행랑行廊 곳곳에 창고倉庫를 두었는데, 쌀과 고기 등 식량을 저장하는 곡간穀間, 사병이나 하인이 외부 침입에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쌓은 무기고武器庫, 비단과 옷을 저장하는 고방庫房, 잡다한 물건을 저장하는 다락 등 다양한 장소를 창고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보통은 집 안 다양한 공간에 여러 창고를 둬 화재로 다 잃어버리지 않게 분산 배치했지요.

권세가 창고에는 수많은 고기가 썩을 정도로 많은 물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권세가 창고에는 수많은 고기가 썩을 정도로 많은 물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권력이 강할수록 창고의 크기는 컸습니다. 나라에서 받는 물자도 많거니와 많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물자를 보내줬기 때문이죠. 일례로 의종 때 황제의 외척이자 실권가였던 이자겸은 백정들이 굶어죽어 주변 민가의 10곳 중 9곳이 비어있는데, 이자겸 저택 내 창고에 있는 수많은 고기가 썩어갔다고 하지요.

왕겨와 갈대 등으로 얼음을 덮어 시원한 지하에 얼음을 보관했다
왕겨와 갈대 등으로 얼음을 덮어 시원한 지하에 얼음을 보관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으뜸은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였습니다. 빙고氷庫가 있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인 것이지요. 얼음은 나라에서 독점 관리하는 물품으로 큰 불교 행사가 있거나 외국에서 사신이 올 때 황제가 나라를 대표해 바치거나, 신하와 공을 세운 무신에게 하사하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빙고氷庫는 국가 시설이었지요. 이런 빙고를 개인이 소유한다는 건 황제도 두렵지 않다는 의미였지요. 저 당시에는 한겨울에 강에서 캐낸 두꺼운 얼음 위로 왕겨를 덮고 갈대와 지푸라기를 촘촘히 엮어 사방을 감싸 외부 열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는 지하수가 흐르는 차가운 지하 창고에 보관해 언제나 시원한 상태를 유지했지요. 그렇게 얼음을 보관했기에 얼음 하나 보관하려면 좋은 땅을 소유해야 했고 막대한 노동력이 동원해야 했습니다. 귀족 저택 안에 빙고氷庫가 있다는 건 그걸 할 수 있는 귀족이라는 의미이죠.

 

 

 

  • 수발을 드는 노비들의 공간

노비들이 머무는 행랑채
노비들이 머무는 행랑채

잘 사는 귀족들은 본인이 집안 살림을 하지 않습니다. 노비들이 다 해주죠. 고려高麗 때 노비는 주인 집 밖에 살며 출퇴근하는 외거노비와 주인 집 안에 사는 솔거노비 솔거노비 둘이 있습니다. 솔거노비는 귀족 집 안의 행랑채에 머물며 언제 어느 시간대나 귀족을 보필했습니다. 이 솔거노비는 그래도 힘이 좋고 일을 잘하거나 똑똑해 대우를 받는 노비로 한 두칸짜리 방이지만 자기만의 공간이 있고 쪽구들 위에서 잠을 자며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귀족의 용변을 처리하는 노비나 옷을 입히고 시중을 드는 시비 등 항상 귀족 뒤를 쫒아다니며 보필해야 하는 낮은 계급의 노비는 안채 인근 행랑에 있는 작은 방 한구석에서 쪽잠을 자는 등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외거노비는 가랍집 등을 지어 살았는데, 백정보다 더 잘 살았다
외거노비는 가랍집 등을 지어 살았는데, 백정보다 더 잘 살았다

집안일을 대신하는 솔거노비와 달리 외거노비는 귀족 소유의 땅에서 농사일을 하거나 각종 경제활동을 대행하며 귀족의 재산을 불리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은 귀족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국가에 세금을 낼 의무가 없었습니다. 귀족에게 계약한 금액만 지불하면 되었지요. 덕분에 각종 세금으로 재산을 절반 빼앗긴 백정보다 잉여 재산이 많아 잘 살았습니다. 인자하고 권력이 강한 귀족의 외거노비라면 귀족이 자기 노비들도 잘 살아야 본인 권위가 높아진다며 지원을 아끼지 않아 노비가 웬만한 사람 부럽지 않은 부자로 살기도 했고요. 외거노비는 귀족 저택 밖 가까운 곳에서 가랍집을 지어 살았는데, 담장 없는 초가집 모습이었습니다. 허나 고려高麗 때 대부분의 백정이 움집에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가랍집은 아주 살기 좋은 집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외거노비가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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