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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始 : 고려 역사] 짧은 전성기와 몰락의 길

by 롱카이 2026.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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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상한 거란契丹과 빅 딜
북방의 강자로 성장한 거란(연녹색)
북방의 강자로 성장한 거란(연녹색)

중국이 오대십국의 난장판이 되고 한반도에 후삼국시대가 열려 양쪽에서 쌍으로 군웅할거가 일어난 막장의 시대에 만주와 몽골 일대에서 야율아보기가 혜성처럼 등장해 거란족을 합치고 요遼를 건국해 주변국을 합병하며 북방의 패자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송宋을 도와 북방의 중화국가를 멸망시킨 뒤, 전리품으로 얻은 연운 16주는 비옥한 토양 덕에 인구와 경제(쌀)가 막대한 물량으로 쏟아져나오는 황금의 땅이었습니다. 거기에 몽골족, 여진족, 탕구트, 거란족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던 정예병이었기에 군대도 최강이었습니다. 거대한 힘을 가진 거란契丹은 드넓은 중원을 바라보며 삼킬 준비를 했습니다.

거란족
거란족

그런 거란契丹에게 걸림돌은 고려高麗였습니다. 거란契丹은 중원인 송宋을 치기 위해서는 고려高麗가 뒤에서 구경만 하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高麗와 친하게 지내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고려高麗는 거란契丹을 거부했다는 것이죠. 고려高麗는 태조 왕건의 명에 따라 북벌을 진행하던 중이었고, 발해渤海를 멸망시킨 거란契丹과 절대 화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서희의 담판으로 얻은 강동 6주
서희의 담판으로 얻은 강동 6주

이에 거란契丹은 이거 말로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고려高麗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거란契丹도 급히 침공한 것이고 실상은 그저 고려高麗와 어떻게든 대화하기 위해 벌인 무력시위였죠. 이를 파악한 서희는 바로 거란契丹에게 가 제안합니다. 압록강 남쪽에 여진족들이 살고 있어 서로 교류하지 못하니 압록강 아래 강동 6주를 고려에게 달라, 그러면 우리 친밀하게 교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거란契丹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이 압록강을 경계로 맏닿으면 교류도 활발해질 것이고, 고려高麗가 말을 안 듣는다면 바로 침공할 길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란契丹은 이를 수용했고, 애꿎은 여진족만 땅에서 쫒아났습니다. 고려高麗는 세치 혀로 전쟁하지 않고 북벌한 것이니 큰 이득이었습니다.
 
 
 

  •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전면전
보름 만에 나주까지 몽진한 현종
보름 만에 나주까지 몽진한 현종

하지만 강동 6주를 얻은 고려高麗는 바로 성을 쌓아 알박기에 들어서고 거란契丹과의 교류는 여전히 무시했습니다. 고려高麗가 약속을 어기자 화난 거란契丹은 고려高麗를 침공합니다. 그것이 2차 여요전쟁으로 진지하게 빡친 거란契丹은 수도까지 밀고 들어가며 고려 황제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황제 현종은 하루 만에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현 서울)로 도주하고, 보름 만에 나주羅州까지 도망쳤지요. 고려 황제를 잡아 목을 바치려는 수많은 호족들을 물리치며 말입니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몽진 속도에 기가 찬 거란군은 남경南京까지 함락하고는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2차 여요전쟁이 끝났습니다.

귀주대첩
귀주대첩

흐지부지 끝난 전쟁에 거란은 절치부심해서 다시 고려를 침공합니다. 3차 여요전쟁이죠. 이 때는 고려군도 홍화진 전투 등에서 분전하며 시간을 벌었고, 보급이 떨어진 거란契丹은 일단 고국으로 후퇴하려고 했습니다. 허나 고려高麗는 이대로 보내면 또 침입할 것이 뻔하기에 몰살시키려고 했죠. 그래서 고려군과 거란군은 귀주龜州에서 운명의 대결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고려의 압승으로 끝이 났습니다.
 
 
 
 

  • 전성기를 누린 고려高麗
여요전쟁으로 고려의 위상이 높아졌다
여요전쟁으로 고려의 위상이 높아졌다

귀주대첩의 카운터를 맞은 거란契丹은 막대한 병력을 손실해 더이상 송宋은 커녕 고려高麗도 공격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습니다. 북방의 강자 거란契丹을 고려高麗가 물리치자 주변국은 놀랐고, 자연스럽게 고려高麗의 위상이 올라갔습니다. 송宋은 고려高麗와 연합하면서도 견제하지만 딱히 위해를 가할 수 없었고 거란契丹은 조용히 고려高麗와 교류했습니다. 여진女眞과 탐라耽羅, 일본日本은 고려高麗에게 공납을 더 열심히 바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진정한 태평성대가 온 전성기였죠.
 
 
 

  • 여진정벌이라는 무리수
거란이 쇠락하자 여진족의 힘이 커졌다
거란이 쇠락하자 여진족의 힘이 커졌다

그러나 그 평화기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거란契丹이 쇠퇴하자 만주에 살던 여진족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그 영향으로 여진족들이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수많은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여진족은 사실상 거란契丹의 지배에서 벗어나 완안부 여진족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여진족의 부상은 거란契丹에게도 골칫거리였지만, 고려高麗에게도 잠재적 적의 부상이었습니다. 이에 고려高麗는 여진족이 더 강해지기 전 선빵을 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진정벌
여진정벌

마침 고려高麗는 북벌이라는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벌을 한다는 명분으로 여진족 영토를 침공했지요. 그것이 여진정벌입니다. 여진정벌을 지휘한 윤관은 우선 여진족 추장들을 초대해 연회를 연 뒤, 기습 살해하며 지도부를 제거하고 진군했습니다. 순식간에 지도자를 잃은 여진족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죠. 허나 이건 큰 패착이었습니다. 여진족은 수많은 부족이 난립했기에 고려高麗 편이던 여진족 부족도 당연히 있었는데 이 부족의 추장도 함께 살해했기에 오히려 모든 여진족의 분노를 샀습니다.

여진족은 백두대간을 넘어 고려가 점령한 동해 해안가 보급선을 공격했다
여진족은 백두대간을 넘어 고려가 점령한 동해 해안가 보급선을 공격했다

고려高麗의 배신에 분노한 친고려親高麗 여진족들은 바로 완안부 여진족에게 달려가 복속을 맹세하며 보복을 시작했습니다. 고려군은 개마고원 이남의 여진족의 땅을 빼앗고 성을 쌓아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했지만, 여진족들은 험준한 백두대간에 난 샛길로 이동하며 각 성에 보급하는 보급선들을 공격하며 소모전을 일으켰습니다. 고려군은 기껏 성을 쌓고도 식량과 물자가 보급이 되지 않아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이에 여진족을 토벌하러 나가면 다 도망갔고요.

갈라수 전투의 대패로 고려는 여진정벌의 동력을 잃었다
갈라수 전투의 대패로 고려는 여진정벌의 동력을 잃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지루한 소모전이 일어나다 결정적인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여진족의 명장 사묘아리가 이끄는 여진족이 갈라수 전투에서 고려군을 괴멸시키며 고려군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안그래도 기나 긴 소모전으로 여론이 좋지 않은데 대규모 전투에서 참패하자 고려高麗 조정은 여진정벌을 중단하고 점령한 지역을 여진족에게 돌려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첫단추가 잘 못 끼워진 여진정벌은 고려高麗의 큰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 여진정벌이 굴린 큰 공
고려의 침공을 막아내고 확장해 중원의 패자가 된 금
고려의 침공을 막아내고 확장해 중원의 패자가 된 금

여진정벌의 대가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찬란한 전성기를 누리던 고려高麗는 정벌로 국력을 소모했고 침체되었습니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고려高麗를 이긴 완안부 여진족은 여진족을 통합한 뒤, 금金을 세워 거란의 요遼를 멸망시키고 송宋을 장강 이남으로 밀어냈습니다. 변방 숲의 작은 부족이 순식간의 중원의 패자가 된 것이죠. 다행히 금金은 고려高麗와 다시 결판을 내길 꺼려했지만, 송宋과 긴밀히 연합하던 고려高麗는 급변한 천하질서에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여진에게 굴복하냐를 두고 대립하다 벌어진 이자겸의 난은 황권을 추락시켰다

금金은 고려高麗와 싸우지는 않았지만, 고려高麗에게 화친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고려高麗 조정은 화친을 수용하자는 화친파와, 맞써 싸우자는 강경파 둘로 나뉘어 싸웠습니다. 이 때 황제의 외척인 이자겸은 자신의 사병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화친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강경파와 화친파 둘이 심히 대립하다 결국 사건이 터지는데, 황제 인종이 이자겸을 암살하려는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자겸의 충복이자 당대 최강 무력을 자랑하던 척준경에게 제압당하고 역으로 황제가 살던 황궁이 불타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자겸의 난으로 황제 인종은 귀족 이자겸에게 패배하고 잡혀 사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실시한 서경천도운동
황권 강화를 위해 실시한 서경천도운동

이후 인종이 척준경을 꾀어내 이자겸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성공은 하나, 황제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에 황제는 권위를 다시 살리기 위해 이자겸의 반대파인 강경파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 강경파 대표가 묘청과 정지상으로 북벌의 중심지 서경西京(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북벌하며 금金과 싸우자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서경천도운동으로 인종은 묘청과 긴밀히 대화하며 황제를 따르는 서경西京으로 천도를 준비했습니다. 이는 개경開京(현 개성)에 터를 잡은 문벌 귀족에게 비상인 상황이었습니다. 수도를 꽉 잡아 나라를 지배하는 권력을 쥐었는데, 수도를 변경하면 모두 잃기 때문에 반발하고 나섰죠. 마침 하늘도 문벌 귀족을 도왔습니다. 궁궐을 쌓으며 천도를 준비하던 서경西京에 각종 재해가 끊이지 않으며 도읍지로써 좋지 않은 모습만 보였습니다. 초조해진 묘청이 대동강에 기름떡을 빠뜨리고는, 떠오르는 기름을 보고 용이라고 사기치다가 들통나는 등 무리수를 두다 더 악화되었고요.

고려에서 가장 참혹한 내전이었던 묘청의 난
고려에서 가장 참혹한 내전이었던 묘청의 난

결국 인종은 서경西京으로 천도하는 걸 포기했습니다. 이에 강경파가 반발하며 위爲라는 나라를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지요. 이것이 묘청의 난입니다. 개경開京 문벌 귀족은 동경東京(현 경주) 출신인 김부식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반란 자체는 1년 간 진행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절멸시키는 총력전 급 전투가 벌어지며 참혹한 내전으로 변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위爲는 멸망했고, 문벌 귀족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묘청의 난 이후 문벌귀족의 세상이 된 고려
묘청의 난 이후 문벌 귀족의 세상이 된 고려

고려高麗의 제2도시였던 서경西京은 순식간에 반란의 도시로 낙인찍혀 추락했고, 김부식의 도시인 동경東京이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전리품은 문벌 귀족이 나눠가지며 고려高麗는 문벌 귀족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황제조차 문벌 귀족의 눈치를 보는 등 문벌 귀족에게 무서울 것이 없는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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