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당大唐 몰락과 찢어진 삼한三韓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唐을 한반도에서 내쫒아 삼한일통三韓一通을 이룩한 이후에도 당唐의 국력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전세계 제국을 보면 비잔티움 제국, 우마위야 칼리파국(후대에는 압바스 칼리파국), 당 이 세 나라가 각각 유럽, 중동,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패권국이었죠. 당唐은 압도적인 국력으로 동아시아에 평화 질서를 유지했고, 찬란한 선진 문화를 주변국에서 수출했습니다. 통일신라 역시 그 평화 질서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안식은 875년 당唐나라 한 가운데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으로 깨졌습니다. 황소가 일으킨 전란은 당唐나라 전역을 휩쓸었고 수많은 군대를 한줌의 재로 만들며 국력을 크게 갉아먹었습니다. 그리고 황제 친위대와 정예 병사들이 난에서 소모되자 토번이 날뛰며 수도 장안長安을 불태우는 등 찬란하던 당唐이 급격히 쇠락했습니다. 이제 모두 당唐이 약해졌음을 눈으로 확인했고, 천하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화中華 땅에서는 당대唐代의 지방 국방을 책임지는 절도사들이 서로 자기를 왕으로 책봉하며 나라를 세우고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중앙은 이들을 진압하지 못했고, 결국 거대한 제국은 여러 나라로 쪼개졌습니다. 이게 오대십국시대입니다. 이렇게 대당천하大唐天下의 종말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반도의 신라는 당唐보다 더 일찍 분열되어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唐에서 황소의 난이 발발할 무렵 신라는 이미 왕의 권위가 땅으로 추락한 상태였습니다. 진골귀족들은 서로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서로 암살했고, 때문에 왕이 1년에 3명씩 바뀔 정도로 막장 상태가 되었습니다. 진골귀족들의 오랜 내전으로 신라 국고는 빠르게 비어갔고, 농민들과 호족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며 거병했습니다. 신라 중앙군은 이들을 막지 못하고 서라벌(현 경주)에 틀어박혀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죠. 그렇다고 당唐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질서를 수호할 당唐 자기들도 이미 난세에 들어서 누굴 챙길 상황이 아니었죠.
- 혼세混世가 만든 기회

그 사이 한반도의 야망 넘치는 군주들이 혼란상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합니다. 이들은 신라 중앙은 힘이 없고 중국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한반도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는 걸 빠르게 눈치채고, 그 공백을 자기의 것으로 만듭니다. 버림받은 신라의 왕자 궁예와 옛 백제 땅에서 군사를 일으켜 대군을 만든 견훤이 그 예시이죠. 이들은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한반도 전역에 퍼진 호족들을 빠르게 포섭하며 흡수해갔습니다.

특히 궁예는 놀라운 외교력과 통치력으로 서북부 호족들을 전부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혼란상에도 상관하지 않고 꾸준히 중국과 교역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평안도 일대의 패서호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막강한 국력을 확보했죠. 그리고 그 패서호족에는 천재 왕건이 있었습니다.
- 호족들과 함께 고려高麗를 세운 왕건

왕건은 궁예 밑에서 군사로 일하며 놀라운 전공을 세우고 틈틈히 궁예 휘하 사람들 중 자기 세력의 사람을 만들어갔습니다. 궁예가 어렵게 포섭한 호족들에게 접근해 거래하며 그들을 자기를 따르는 자로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죠. 이렇게 왕건은 궁예 아래에서 일하며 몰래 궁예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자기 힘을 키워갔습니다. 이에 궁예도 위기감을 느끼고 여러 시험을 내며 왕건을 견제하죠. 이를 왕건은 다 눈치채고 해쳐나가지만 말이죠.

또한 궁예와 왕건은 시대의 흐름을 잘 읽었습니다. 후삼국시대는 힘이 강한 호족이 군대를 이끌고 다른 호족을 제압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신라가 구축해 놓은 골품제 같은 신분제 따위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비천한 노비든 신분이 고귀한 진골이든 칼이나 화살 맞으면 죽는 건 똑같았으니까요. 철저하게 힘이 지배하는 시대로 능력주의가 극한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궁예는 능력 사회를 원했고, 왕건은 능력 사회를 매우 잘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지역이나 신분은 무시하고 철저하게 공로에 따라 호족을 대우했고, 호족과 연합해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 왕과 귀족들을 포용했으며, 최종적으로 견훤을 포섭하고 견훤 아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의 싸움에서 이겨 삼한일통三韓一通을 다시 이뤄냈습니다.
- 천재 왕건의 고려 통합 작전

왕건이 세운 고려高麗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호족들의 합의 하에 탄생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건국의 지분 대부분은 호족이 가지고 있었죠. 보통 이런 경우, 호족이 마음에 안 들면 봉기해 또다시 전란이 일어나기 쉬웠습니다. 일본 난보쿠초시대가 끝나고 나서 70년 뒤에 똑같은 이유로 반란이 일어나 세이난시대가 열리거나, 이슬람 세계에서 허구한 날 권력이 뒤바뀌는 피트나فتنة가 발생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정치 천재 왕건은 이걸 다 못하게 명분을 세웁니다. 우선 혼란스러운 중국의 여러 국가에게 외교문서를 보내 왕건을 고려高麗의 주인으로 인정받아 호족들이 감히 왕건을 권자에서 끌어내리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고려 안에서 노골적으로 황제皇帝 행세해도 중국이 신경쓸 여력이 없다는 걸 알아 호족들에게 왕건 스스로를 천자天子로 선포하며 권력의 급을 보여줬습니다.

이렇게 호족들에게 최고 정점에 있는 자임을 확인시킨 왕건은 이어 호족 길들이기에 갔습니다. 먼저 당근을 줬는데, 왕건에게 협조한 호족과 신라 정권에 충성을 바친 호족 두 세력에게 큰 상을 내리며 호족들이 왕건에게 충성해야 이득을 본다는 인식을 확 심어줬습니다. 그리고 호족들이 가진 토지와 권력은 인정하되, 그 호족을 중앙에 불러 자기 토지를 잘 관리하게 권한을 줬습니다. 그러면서 순순히 중앙에 진출한 호족들에게는 그동안 인정하지 않은 토지를 인정하는 등 당근을 주고, 중앙에 가지 않은 호족들의 요구사항은 무시했습니다. 이는 호족들이 너도나도 중앙으로 진출해 중앙에게 복종하며 자기 이권을 챙기게 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며 중앙에 대항할 호족들이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왕건 말을 잘 듣는 호족에게 떡고물을 왕창 주면서 호족 길들이기에 성공한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강력한 군대를 가진 호족이라면 다 무시하고 반란을 일으켜 바로 왕건 군대에게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아주 훌륭한 명분을 내세웁니다. 마침 북방에 거란족이 세운 요遼가 있었습니다. 요遼는 만주와 몽골 일대를 장악하고 강력한 기병으로 중국과 한반도를 위협했습니다. 이에 왕건은 국명을 고려高麗로 짓고 거란족에게 빼앗긴 고구려의 옛 영토 만주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호족 군대를 싹싹 긁어 국경지대인 서경西京(현 평양)에 보냈습니다.

이 때 말 안 듣는 호족이 나타나면? 바로 매국노 취급당하는 것이죠. "저 잔악한 거란족으로부터 우리의 신성한 고토를 회복하는데 여기에 협조를 안해? 저 자식 거란 간첩이네?!"를 시전하는 겁니다. 이러면 어쩌겠습니까? 별 수 없지요, 수많은 호족들에게 다구리 당하지 않으려면 눈물을 머금고 군대를 북방으로 보내야 합니다. 물론 왕건은 말만 북벌을 외칠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했어요. 그 저 호족들의 사병을 중앙군의 관리 하에 놓았을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물리적 위협도 제거해 호족이 왕건의 고려高麗에 납작 엎드릴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실로 정치 천재이죠.
- 고려를 완성한 광종
![드라마 [달의 여인 : 보보경심 려]에 나오는 광종](https://blog.kakaocdn.net/dna/n9cUd/dJMcaiKjrB5/AAAAAAAAAAAAAAAAAAAAAKGtIksftZo76YoVUJt4oFRwx2wUpFA3gcaEvJW8aMDr/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828315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CowtGF5458oW6%2FvJlDapv8Gn6Is%3D)
태조 왕건은 호족들을 꿀이 흐르는 함정 안에 몰아넣어 자기 손 안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왕건이 죽고 나면 이제 호족들은 숨통이 놓이죠. 여전히 시스템적으로 고려 중앙에 묶여 있지만 그걸 지휘하는 황제가 왕건이 아니니 살살 굴리면 호족들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렸습니다. 허나 태조 이후 황제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태조 뒤를 이어받은 혜종은 쇠를 손으로 구부리고,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자객을 맨주먹으로 한방에 골로 보낸 괴물이었습니다. 허나 재위 기간이 2년으로 짧았습니다. 혜종이 붕어한 뒤 이어 즉위한 정종은 중앙집권을 위해 냅다 호족들을 대숙청했습니다. 그러다 업보를 얻어서인지 재위 4년 만에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그 유명한 광종이 집권했지요.

광종은 현대의 인식과 달리 재위할 때 호족에게 너그러운 군주였습니다. 허나 이는 광종이 태조 왕건의 통치 이념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태조 왕건은 불교를 장려했는데, 단순히 장려한 것이 아닌 100개가 넘는 불교 종파들을 모두 포용하고, 불교에게 지방 전역의 행정과 세납을 맡겨 고려 국력을 향상시켰습니다. 광종은 이를 이해하고 수많은 불교 종파를 크게 2개 종파로 통합시키고 후원하며 불교 세력을 고려 황제皇帝에 충성하는 세력으로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사찰을 통해 세금과 정보가 조정으로 쏙쏙 들어왔고요.

광종은 누구보다도 태조의 뜻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슬아슬한 호족 연합체를 유지하려는 태조를 넘어 고려를 완전한 선진 국가로 바꾸고 싶어했습니다. 때문에 중국 상황을 면밀히 주시했고,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송宋이 천하통일天下通一을 이루자 재빨리 축하하며 송宋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송宋과 교류하며 최강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과거제입니다. 광종은 송宋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 일단 노비안건법을 시행해 호족의 사유물인 노비들을 국가 소유물인 양인으로 바꿔 호족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본격적인 뒤엎기에 앞서 선빵을 날린 것이죠. 이어 송宋에서 직접 과거제 전문가를 초빙해 고려에 과거제를 정착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호족들에게는 태조의 뜻이라며 묵살시키고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그 호족을 중앙에서 내쫒아 아무것도 없는 고향으로 보내는 귀향歸鄕 형벌을 내리며 숙청했습니다. 광종은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했는데 정작 처형한 호족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 지방으로 내쫒았죠.

여하튼 광종은 중앙에 모든 걸 바친 호족 중에 말을 안 듣는 자는 아무것도 안 남은 고향으로 추방시키고, 철저하게 능력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를 실시하며 황제가 눈치게임하지 않고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과거제로 천거한 관료들은 철저하게 황제皇帝에게 충성을 바치며 중앙과 지방을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황제皇帝의 손아귀에 놓였고, 이렇게 광종의 개혁으로 관료주의로 돌아가는 고려高麗가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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