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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공학/저멀리 우주로

[저멀리 우주로: 우주경쟁] 첸쉐썬, 미국이 놓친 천재

by 롱카이 202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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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첸쉐썬 박사
첸쉐썬 박사
첸쉐썬 박사

청나라 항저우에서 태어난 첸쉐썬은 어릴 때부터 수재여서 상하이교통대학교 철도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의화단 운동에서 청나라를 굴복시킨 미국은 받은 전쟁배상금으로 청나라 인재들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 친미파 인사들로 키우려는 목적으로 인재들을 모았고 첸쉐쒄도 유학 대상자로 선발했습니다. 그는 MIT에 입학해 기계공학 석사를 취득하고 칼텍에 항공우주학 박사과정으로 입학했습니다.

테오도르 폰 카르만
테오도르 폰 카르만

그가 입실한 연구소는 테오도르 폰 카르만이 교수로 재직한 연구소로 당시 태동하던 항공우주공학의 수학적 이론을 이끈 천재였습니다. 헝가리에서 독일국(나치 독일)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테오도르 폰 카르만은 첸쉐썬을 특히나 아꼈고 그의 고향 중국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첸쉐썬은 천재 테오도르 폰 카르만 아래에서 빠르게 항공우주공학을 배우고 연구했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미국 로켓개발에 앞장선 첸쉐썬
미국 로켓개발에 앞장 선 첸쉐썬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첸쉐썬 박사는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제트엔진을 연구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와 함께 V2 로켓 개량 및 연구를 담당했습니다. 특히 독일국 출신인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 대신 미국에서 V2 로켓 엔진을 정확히 이해할 인재가 필요했는데 첸쉐썬 박사가 이를 담당해 미국이 V2 로켓을 이해하도록 선도했습니다.
 
 
 

  • 격변한 시대와 첸쉐썬 박사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

1947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한 첸쉐썬 박사는 중화민국 국적으로 미국에서 생활했습니다. 허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승전하면서 중국은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체제에 편입되었고 미국은 미국 내 중국인을 경계했습니다. 1949년 칼텍 교수로 재직한 첸쉐썬 박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하며 미중관계는 악화되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하며 미중관계가 악화되었다

1950년 5월 첸쉐썬 박사는 고향 항저우의 연로한 아버지를 만난다는 이유로 무기한 휴가를 냈습니다. 이에 미국 과학계는 첸쉐썬 박사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기밀을 넘기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돌았습니다. 첸쉐썬 박사는 순수하게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지만 미국 정계의 의심도 함께 받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10월 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며 미중관계는 파탄이 되었고 첸쉐썬 박사는 그 가운데에서 미국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첸쉐썬 가족
첸쉐썬 가족

결국 1950년 첸쉐썬 박사는 로켓개발 계획에 모두 제외되었고 이에 낙담한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결정을 들은 칼택 학장은 킴벌 해군 참모총장을 보냈고 킴벨 참모총장은 매우 공손하게 그에게 귀국을 만류했지만 첸쉐썬 박사는 귀국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에 미군은 LA 공항에서 그를 체포해 별장에 구금했습니다. 구금은 2주 후 풀렸지만 FBI가 계속 도청 감시했습니다.

사과상자로 중국의 아버지 상황을 파악한 첸쉐썬
사과상자로 중국의 아버지 상황을 파악한 첸쉐썬

미국 내에서도 국가적 천재인 첸쉐썬 박사를 어찌할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졌습니다. 그의 편이었던 사람들은 첸쉐썬 박사에게 미국에 머물 것을 제안했고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보증했습니다. 첸쉐썬 박사 역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그는 고향의 동포들이 미국의 기술에 목숨을 잃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미국 정부는 미국 국가기밀을 잘 아는 그를 일단 5년간 미국에 구금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고 그를 아낀 테오도르 폰 카르만은 연줄을 이용해 첸쉐썬의 아버지 사진을 사과상자에 밀입해 미국에 있는 첸쉐썬에게 보냈습니다. 첸쉐썬 박사는 스승이 보낸 사진을 통해 아버지가 중국에서 고위관직자로 재직한다는 근황을 알았습니다.
 
 
 

  •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간 첸쉐썬
1954년 제네바 협정
1954년 제네바 협정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은 제네바 협정을 열어 베트남 분할계획과 포로교환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 내 강제구금된 중국인 유학생 200명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중국 내 억류된 미군 포로들을 미국으로 송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고심 끝에 미군 포로를 선택했고 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첸쉐썬 박사를 비롯한 중국계 유학생들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보냈습니다. 미국 정부는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 유학생들의 잠재성을 과소평가했기에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미해군 참모총장 킴벌
미해군 참모총장 킴벌

이에 미해군 참모총장 킴벌은 "미국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일이다, 첸쉐썬은 나만큼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를 몰아냈다!It was the stupidest thing this country ever did. He was no more a Communist than I was, and we forced him to go!"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첸쉐썬 박사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갔고 그는 중국 인민들을 행복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이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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