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등성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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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우주과학연구소宇宙科学研究所
NASA는 이토카와 히데오 교수의 카파 로케토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1957년에 발사된 대기관측용 로켓인 카파 로케토 6형은 2단 추진 고체연료 로켓이었기에 NASA가 원하던 기술이었습니다. NASA는 그들을 주목했고 미군은 일본이 평화조약을 어기고 미사일로 재무장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습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일본은 로켓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되 중국이 핵개발에 성공하면 일본은 이를 고려할 수 있다며 미국에 대한 적개심은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또한 도쿄대학교는 연구원들을 위해 1964년 우주과학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이제 일본은 미국이 NASA를 중심으로 우주개발을 하고 프랑스가 CNES를 중심으로 우주개발을 하듯이 우주과학연구소宇宙科学研究所를 중심으로 우주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일본 정부 역시 예산을 전폭적으로 확장하며 우주과학연구소宇宙科学研究所를 지원했습니다.
- 람다 로케토
우주과학연구소는 카파 로케토를 연이어 발사하며 충분한 자료를 수집해갔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가고시마 우주관측연구소를 설립해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가 카파 로케토를 마음껏 발사하게 지원했습니다.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는 4단 추진 고체연료 로켓인 람다 로케토를 연구개발했습니다. 1966년 람다 4S 로케토가 개발되어 처음 발사되었고 성공적으로 발사되었습니다.
- 오스미 인공위성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는 동시에 독자 인공위성 개발도 진행했습니다. 오스미 인공위성은 당시 최첨단기술이었던 태양전지를 탑재하지는 못해 건전지로 작동하는 인공위성이었으며 우주궤도에 안착해 우주 과학자료를 수집하고 일본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는 1966년 9월 26일 오스미 1호를 람다 4S에 탑재해 발사했으나 오스미 1호 인공위성이 높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어 실패했습니다.
- 1970년 성공한 오스미 5호 발사
인공위성을 우주로 쏘아올리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습니다. 작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첨단기기 인공위성은 발사 시 고압고열을 견뎌야 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또다른 첨단기술이 요구되었습니다. 소련은 세르게이 코롤료프라는 천재가 이 문제를 해결했으며 미국은 수많은 인재들이 뛰어들어 이를 해결했습니다.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는 어떤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계속 실험하고 실패하며 자료를 축적해가며 개선해갔습니다.
그리고 1970년 2월 11일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는 오스미 5호를 람다 4S 로케토에 탑재해 발사했습니다. 사선으로 날아간 람다 4S는 높은 추진력으로 드높은 우주로 힘차게 날아갔습니다. 람다 4S 로케토는 그 어떤 제어장치도 없는 순수한 로켓으로 우직하게 우주만 바라보고 날아갔습니다.
16m 크기의 람다 4S는 4단 추진을 하며 우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오스미 5호가 궤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의 연구원들의 노력은 부응을 받았습니다. 오스미 5호는 목표궤도보다 조금 아래 궤도에 안착해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에 성공신호를 전송했으며 전세계에 일본이 독자기술로 우주를 개척했음을 널리 알렸습니다.
- 뮤 로케토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는 람다 4S 로케토로 성공적인 발사를 여러차례 수행한 이후 람다 4S 로케토를 개선한 뮤 로케토를 개발했습니다. 순수하게 고체연료로 추진하는 뮤 로케토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고체연료 로켓으로 인정받았으며 일본의 항공우주기술을 선도하는 로켓으로 활약했습니다. 우주과학연구소宙科学研究所는 오스미 5호 발사 이후 뮤 로케토로 인공위성을 발사하며 독자 우주개발을 이어갔습니다.
- 일본마저 미국 패권주의를 비판하다
한편 1970년 2월 11일 일본이 독자적인 우주기술을 보유하게 되자 일본 병무청은 태도를 바꿨습니다. 1970년 3월 병무청은 핵폭탄을 미국과 소련만 보유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일본은 자위 역할을 위해 방어병기로 핵폭탄을 보유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은 홋카이도 지역이 소련과 인접한 국경이었으며 서부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적이 있었기에 냉전시대 최전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역시 미국의 핵우산을 불신했으며 독자 핵보유를 외쳤습니다.
특히나 1960년대부터 쿠릴 열도 중 2개의 남쿠릴 섬들을 둔 일본-소련 분쟁이 발발하자 일본 자위대는 소련군의 침공을 대비했습니다. 허나 자위대의 능력으로는 소련군의 상륙을 도저히 막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병무청은 한계가 명확한 자위대 재래식 병기 대신 핵무기 보유를 진지하게 고려했고 미국의 핵우산이 아닌 독자 핵보유를 외쳤습니다. 이에 미군은 일본을 압박해 핵보유를 무마시켰지만 대신 NASA의 액체연료 기술을 이전하며 일본의 미사일 개발을 지원했습니다.
- 일본의 영웅 이토카와 히데오
일본 자위대는 최종적으로 핵폭탄과 대륙간탄도유도탄을 얻지는 못했지만 유도탄(미사일)로 무장해 소련군 및 중국군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요구를 할 수 있던 것 역시 이토가와 히데오 교수의 람다 4S 로케토 개발 덕분이었으며 이토카와 히데오 교수는 일본을 냉전 한가운데에 주권을 지켜준 영웅으로 칭송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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