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6세기 개신교가 등장해 북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로 전파되자 로마 가톨릭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유럽인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으며 과학과 공학으로 인간이 주의 뜻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이는 주의 뜻을 따르려는 기독교에게 큰 도발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고민했고 1869년부터 1870년 1년에 걸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로 해답을 내렸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당시 유럽에 만연하던 반가톨릭 사상과 과학만능주의, 개신교에 대항해 이들을 이단으로 규명하려는 목적으로 1869년 연말에 바티칸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따르는 가톨릭인 중 최고의 목자이자 스승인 교황은 교리를 확정할 때 주의 은총에 따라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류성을 확립했습니다. 그렇다고 교황이 성경에 없는 새 해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며 신앙과 도덕 문제에서만 오류가 없다고 재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을 따르지 않는 개신교, 반가톨릭주의자들, 과학과 공학을 맹신하는 자 모두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성경에 대한 참된 해석은 오로지 로마 가톨릭만 가지고 있으며 그 외의 해석은 일체 부정했습니다. 또 과학이나 철학 역시 이단적 내용을 담는다면 그 학문들은 이단이며 이를 금지할 권리가 있다고 재확인했습니다.
- 복고 가톨릭교회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신교도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비판했습니다. 특히 도덕과 신앙 교리를 정할 때 교황의 의견은 오류가 없다는 주장은 말도안되는 주장이라며 가장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교황의 무오류성은 동의할 수 없다는 신학자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해 독자적인 주교를 임명하고 복고 가톨릭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따르되 교황무류설만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 로마 가톨릭의 얼굴이 된 예수회
한편 교황을 따르지 않은 예수회는 전세계에 로마 가톨릭을 전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장 신앙이 다르면 배척하고 공격하는 교황청이나 개신교와 달리 예수회는 포교지의 문화를 먼저 파악하고 공부한 후, 그 문화를 이해해 타국 문화를 존중하며 사랑을 실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일례로 대청(청나라)에 로마 가톨릭을 포교한 예수회는 유학을 먼저 이해한 후 유학의 이치에 온 백성을 사랑하라는 부분만 추가했습니다. 이는 유학자들의 관심을 일으켰고 대청 뿐만 아니라 조선, 일본, 월남의 유학자들이 예수회를 서학西學이라 부르며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 축제와 문화를 존중하고 그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고 자연스럽게 융합을 시도했습니다. 아즈텍과 마야문명이 주류였던 멕시코에서는 죽음의 날 축제와 로마 가톨릭을 융합해 현지 문화를 존중하면서 기독교를 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회는 타 기독교에 비해 매우 온건해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회는 전세계로 퍼져 어느새 전세계 로마 가톨릭을 대표하는 교단이 되었습니다.
- 추락한 교황 권위
한편 20세기 초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유럽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황은 지위를 이용해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협정을 채결할 것을 촉구했으며 구호단을 보내 전쟁터에 고통받는 민중들을 구원하려는 시도를 수차례 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그의 권위로 전쟁을 중단시키지 못했고 이 사건으로 교황의 권위가 약함을 전세계에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비오 12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협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그는 종교활동에 전념하며 실무는 파스칼리나 레네르트라는 수녀에게 맡겼습니다. 문제는 파스칼리나 레네르트는 교황의 정치적 업무를 위임하는 수준이 아닌 아예 교황처럼 행동하며 추기경들을 제멋대로 임명하고 로마 가톨릭을 어지럽혔습니다. 교황 비오 12세와 수녀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모두 무척 고집이 강했기에 그들 마음대로 추기경들을 등용하거나 해임했고 많은 추기경들의 원성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교황 비오 12세가 선종하자 상대적으로 정치적 욕심이 없고 조용한 론칼리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조용하던 론칼리 추기경은 요한 23세로 즉위했습니다. 추기경들은 그는 성격이 조용하기에 평탄한 교황생활을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허나 요한 23세는 성격은 조용하더라도 이미 추락할데로 추락한 로마 가톨릭은 이대로라면 세상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것이라 생각했으며 로마 가톨릭 대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인물이었습니다.
1962년 10월 11일 요한 23세는 갑자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로마 가톨릭 추기경만 입장하던 기존 공의회와 달리 개신교,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를 비롯해 이단 교회들과 평범한 평신도까지 모두 초대했습니다. 그는 기존 공의회 절차가 아닌 참석한 자들 모두 자유롭게 발언하는 발언권을 제공해 모든 의견을 받고 대대적인 변화를 꾀했습니다.
요한 23세에 이어 바오로 6세 때까지 이어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먼저 라틴어로만 할 수 있던 미사를 각 나라별 언어로 할 수 있게 지정했습니다. 또한 그동안 로마 가톨릭의 적으로 간주하던 개신교와 화해하고 동방 정교회를 비롯한 여러 정교회 교회들과도 화해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따르는 자라면 어떤 종교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오랜 관습이던 유대교 탄압도 금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예수를 살해한 살인마로 생각해 탄압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탄압을 금지한 것입니다. 또 금서로 여기던 외경을 일부 허용했고 주를 모르고 산 사람이라도 착하게 산 사람이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 온건으로 변한 로마 가톨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의 성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동안 다른 종교관을 인정하지 않고 불용하던 로마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변한 세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주최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로마 가톨릭을 더욱 정교화했다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의의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정교회, 개신교와 화합하며 성경 공동번역을 진행했습니다. 예수회만이 개방의 자세로 이끌던 로마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전체가 개방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이끄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대중들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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