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종교

[종교의 이해: 베다] 구루 나낙과 시크교

by 롱카이 2023. 11. 30.
반응형
  • 구루ਗੁਰੂ 나낙
구루 나낙
구루 나낙

어느날 강둑에서 갑자기 사라진 편자브 관료 나낙 데브 지는 3일 뒤에 그의 친구이자 무슬림은 마르다나와 함께 갑자기 나타나 세상을 순례하며 그의 가르침을 설파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진리이자 절대하신 주를 따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대신 율법과 경전에 집착하지 말고 종교가 어떤 종교이든 상관하지 않고 각 종교 안에서 최선을 다해 주께로 나아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구루 나낙의 가르침
구루 나낙의 가르침

즉 무슬림이라면 쿠란القرآن 형식이 아닌 내용을 이해하며 주께로 나아가고 사나타나 다르마सनातन धर्म인이라면 깨달음을 얻어 해탈मोक्ष로 나아가고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예수가 전한 복음ευαγγελιον을 따르며 주께로 나아가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종교가 다르다고 싸우고 다툴 필요가 없으며 그저 각자의 방식을 존중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라는 것이 나낙 데브 지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구루ਗੁਰੂ를 붙여 구루ਗੁਰੂ 나낙이라 불렸습니다.
 
 
 

  • 부엌 랑가르ਲੰਗਰ
랑가르
랑가르

구루 나낙은 순례하며 가르침을 전파하며 신분이라는 것 자체가 없고 만민이 평등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만민이 평등함을 설파하는 수단으로 사원이 아닌 부엌을 만들었습니다. 부엌에서 누구나 다함께 요리하고 요리한 음식을 누구에게나 베풀며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그것이 랑가르ਲੰਗਰ로 구루 나낙은 랑가르ਲੰਗਰ를 매우 중요시여겼습니다.

랑가르에서는 누구나 일자로 나란히 앉았다
랑가르에서는 누구든 일자로 앉아 식사했다

그래서 랑가르ਲੰਗਰ에 찾아온 이들은 어떤 사람이든 음식을 베풀었으며 이때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일자로 바닥에 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왕족이건 귀족이건 가난한 자이건 무슬림이건 불교도이건 사나타나 다르마인이건 구루를 따르는 자던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함께 일자로 앉았습니다.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랑가르ਲੰਗਰ를 방문하자 구루 나낙은 그도 일자로 앉아 다함께 식사하기를 권유했고 그는 흔쾌히 바닥에 앉아 다양한 사람들과 다함께 식사했습니다.
 
 
 

  • 세가지 기둥, 다섯가지 도둑, 다섯가지 덕목
세가지 기둥
세가지 기둥

율법이 아닌 랑가르ਲੰਗਰ로 가르침을 실현한 구루 나낙은 제자들에게 지켜야 할 신조를 세가지 기둥, 다섯가지 도둑, 다섯가지 덕목을 잊지 않고 따르면 된다고 전했습니다. 세가지 기둥은 각각 진리ਵਾਹਿਗੁਰੂ를 찬미하는 찬송가를 부르고 진리ਵਾਹਿਗੁਰੂ를 명상하는 남 자포ਨਾਮ ਜਪੋ, 속세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라는 키랏 카로ਕਿਰਤ ਕਰੋ, 남에게 베푸라는 반드 차코ਵੰਡ ਛਕੋ입니다. 그리고 경계해야 하는 다섯가지 도둑은 성욕ਕਾਮ, 분노ਕਰੋਧ, 물욕ਲੋਭ, 애착ਮੋਹ, 교만ਹੰਕਾਰ입니다. 반대로 추구해야 하는 다섯가지 덕목은 진리ਸੱਚਾਈ, 만족ਸੰਤੋਖ, 인정ਦਯਾ, 겸손ਨਿਮਰਤਾ, 사랑ਪਿਆਰ입니다.
 
 
 

  • 고빈드 싱과 시크교ਸਿੱਖੀ
구루 나낙의 죽음
구루 나낙의 죽음

구루 나낙은 죽기 전 신실한 후계자에게 구루 자리를 제공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후대 구루들은 시크교를 융성시켰습니다. 허나 악바르 대제 사후 무굴제국의 황제가 된 자한기르 황제는 시크교를 이끄는 구루 아르잔을 위험분자로 바라보았습니다. 허나 명분이 없어 처형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자한기르 황제의 장남 쿠스라우 황자는 구루 아르잔을 만났고 구루 아르잔이 그를 축복했는데 쿠스라우 황자가 1년만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자한기르 황제는 반란을 평정하고 반란주동자를 축복한 구루 아르잔을 체포해 고문했고 그 후유증으로 구루 아르잔은 사망했습니다.

무장한 구루 고빈드 싱
무장한 구루 고빈드 싱

그럼에도 여전히 시크교도들은 구루ਗੁਰੂ들을 따랐습니다. 허나 9대 구루ਗੁਰੂ가 사라지고 구심점이 사라진 시크교도들은 방황했습니다. 이때 10대 구루ਗੁਰੂ에 오른 고빈드 싱이 시크교ਸਿੱਖੀ를 대대적으로 개혁했습니다. 구루 고빈드 싱은 탄압으로부터 시크교도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방어를 주장했고 칼서(전사)들을 모았습니다.

무장저항한 시크교도
무장저항한 시크교도

고빈드 싱은 구루ਗੁਰੂ에 올랐지만 스스로 구루ਗੁਰੂ 자리를 버렸고 경전을 구루로 삼아 구루ਗੁਰੂ 그란트 샤히브ਗੁਰੂ ਗ੍ਰੰਥ ਸਾਹਿਬ를 따를 것을 중용했습니다. 그리고 칼서와 함께 시크교도들을 학살하는 무굴군에 맞써 저항운동했습니다. 시크교도들은 누구든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그들이 공격하면 저항한다는 신념을 따라 침공하는 무굴군에 맞썼습니다. 그들은 노란 기를 들고 푸른 옷을 입으며 침략자를 모두 격퇴했습니다.

시크교도의 용맹함은 대영제국도 인정했다
시크교도의 용맹함은 대영제국도 인정했다

애초에 시크교도들이 주로 살던 편자브 지역은 척박한 산악환경이었기에 사람들의 체력이 좋았고 예로부터 전투민족으로 알려진 자들이었기에 시크교도들이 칼을 잡고 저항하자 무굴군은 이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어 인도를 침공한 대영제국 동인도회사 군대도 시크교도들의 터전을 침공했습니다. 시크교도들은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한 대영제국 동인도회사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격렬하게 저항했고 먼저 공격하지 않으며 용맹하게 맞써 싸웠기에 대영제국 동인도회사도 시크교도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폭넓은 자치권을 제공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