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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

나라별 명칭과 다른 이름-서아프리카 편

by 롱카이 2023.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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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리: 레퓌블리크 뒤 말리
팀북투 젠네 모스크
팀북투 젠네 모스크

나이저 강을 중심으로 등장한 가나 제국은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허나 이슬람 국가인 무라비뚠 왕조가 가나 제국을 사하라에서 몰아냈고 빈 사하라 사막은 이내 말리 제국이 차지했습니다. 말리 제국은 이슬람 제국으로 막대한 금을 수출품으로 북방 이슬람 국가와 교류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랍 세계에 “말리”라고 이름을 알렸고 베르베르인도 “말리”라고 불렀습니다. 아랍은 이슬람 제국과 함께 유럽, 이란, 인도, 튀르키예, 중국에 그 나라를 “말리”로 소개했고 모두들 “말리”라고 발음했습니다.

말리에 파병한 UN 평화유지군
말리에 파병한 UN 평화유지군

허나 말리 제국은 이내 외부 세력인 송가이 제국, 바마나 제국이 침공해 지배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바마나 제국 역시 투쿨로르 제국을 건국하며 “투쿨로르”로 한때 이름을 알렸습니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투쿨로르 제국을 점령하며 식민지배했고 투쿨로르 제국 뿐만 아니라 와술루 제국, 케네투구 왕국, 모시 왕국을 점령해 지배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다양한 국가를 하나로 부를 명칭을 고민했고 일시적으로 “오플뢰브”로 불렸다 “수단 프랑셰”(프랑스령 수단)이라는 정식명칭을 지정했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 독립한 말리는 옛 국명인 “말리”를 부활했고 탈식민지 시대에 “말리”라는 이름을 세계에 다시 한번 알렸습니다.



  • 차드: 레퓌블리크 뒤 차드
말라가는 차드 호수
말라가는 차드 호수

기원전 4000년부터 기원전 3000년까지 북아프리카 정중앙은 밀림 지대로 밀림에서 나온 물은 한곳으로 모여 거대한 호수를 이뤘습니다. 이 때 그 호수 주변에 살던 카누리인들은 그 호수를 보며 큰 물이라는 뜻으로 “사더”라 발음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000년 이후 지구 기온이 하강하며 냉대기가 찾아오자 밀림 지대는 건조해지기 시작했고 비는 내리지 않고 물은 증발하기만 하며 물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사더 호수 역시 점차 물이 줄어들었지만 로마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사더 호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누리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발음이 변해 “사더”에서 “차드”로 불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호수는 차드 호수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카누리인
카누리인

허나 시간이 지나며 밀림은 완전 사라지고 사하라만 남았으며 차드 호수도 거의 소멸해 일부만 남았습니다. 때문에 지금은 옛 거대했던 차드 호수를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차드 호수는 전설로 남아 계속 이어져왔으며 차드 호수가 있던 곳과 그 주변을 통틀어 “차드”라고 발음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그곳을 수단 프랑셰에 포함했지만 지명으로 “차드”가 여젼히 쓰였으며 독립 후에는 국명을 “차드”로 지정했습니다.



  • 니제르: 레퓌블리크 뒤 니제르
니제르 사하라
니제르 사하라

서아프리카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나이저 강은 풍요로운 강으로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농업활동을 하며 배를 띄워 먼 곳과 교류할 수 있는 강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나이저 강을 중심으로 등장하고 번영했습니다. 그리고 나이저 강 상류는 고대 이후 기온이 급격하게 변하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뜨겁고 건조한 지역이 되었고 차드 호수는 증발하며 나이저 강 상류는 짧아지고 끝도 없는 사하라가 펼쳐진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기 안좋은 곳이 되었고 여러 부족들이 잠깐 머물거나 제국들이 영토로 지정은 하되 관심을 보이지 않는 버려진 땅이 되었습니다.

니제르 마을
니제르 마을

그 버려진 땅은 이름마저 없었고 19세기 종단 정책에 따라 그 지역을 식민지로 삼은 프랑스 식민제국은 쓸모없는 땅을 어떻게 부를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사하라를 가로지르는 나이저 강의 상류라는 점에서 기인해 그곳을 “니제르”라 불렀습니다. 주변 부족들은 그들 언어로 “나이저”로 불러왔으나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으며 “니제르”로 부를 것을 강요받아 “니제르”라 불렀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니가르”, ”니게르”라 불렀으며 일부 아프리카 민족과 아프리카로 이주한 인도계 사람들은 “니제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나이지리아
칼란바르 카니발

나이저 강은 사하라에서 출발해 남부 온난 지대를 거쳐 대서양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그 온난 지대는 나이저 강 중류입니다. 그리고 중류에 소고트 칼리프국이 건국되었고 이남 기니 만 해안지대는 현지 부족들이 작은 부족 국가들을 건국해 살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은 기니만 해안지대부터 나이저 강 중류 소고트 칼리프국을 점령했고 나이저 강을 영어 발음인 “나이지“라 부르고 나이지 강이 흐르는 땅이라는 뜻으로 ”나이지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나이저 강을 프랑스 발음으로 불러 생긴 니제르와 같은 방법으로 생긴 국명입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니지리아”, “니지리야”로 불렸고 프랑스는 “니제리아”라고 부르며 아랍은 “니지리야”, 이란은 “니지리예”로 부릅니다.



  • 세네갈: 레퓌블리크 뒤 세네갈
세네갈 수도 다카르 해안
세네갈 수도 다카르 해안

서아프리카 대서양을 향해 흐르는 작은 강은 강 이북으로 사하라, 이남으로 밀림과 습한 평원 지대로 나누며 신비로운 자연환경을 이룹니다. 그 강 주변으로 세레르인들이 모여 살았고 주변 사람들은 그 강을 세레르인들의 강이라는 뜻으로 “세네갈”이라 불렀습니다. 북부 베르베르인들과 월루인들은 “세네갈리”라 불렀고 아랍어로 “알시니갈”로 알랴졌습니다. 그리고 세네갈 강에 먼저 가톨릭 선교도를 보내고 먼저 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한 프랑스 식민제국은 “세네갈” 강 이름에서 따 그 지역을 “세네갈”이라 불렀고 이후 종단정책으로 프랑스 식민지를 확장하는 와중에도 아프리카를 가리켜 “세네갈”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게 “세네갈”은 곧 아프리카, 정확히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의미합니다.

  • 감비아: 리퍼블릭 옵 감비아
감비아 강
감비아 강

세네갈 강 이남에는 더 작은 감비아 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영제국은 탐험가를 보내 감비아 강을 탐험하고 감비아 강 일대를 식민지로 지정하며 “감비아”라고 불렀고 이를 유럽에 전해 “감비아”, “감비”, “감비야”로 알렸습니다.



  • 카보베르데: 헤푸블리카 드 카부 베르데
카보베르데
카보베르데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의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의 초석을 다진 위인으로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한 대서양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대서양 항해 중 서아프리카 대륙에서 떨어진 대서양 제도를 발견했고 그 제도를 보고 포르투갈어로 녹색의 곶이라는 뜻으로 “카부 베르데”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그가 발견한 곳은 섬이 아닌 세네갈이었지만 후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대서양에 있는 무인도 제도를 보고 그가 말한 “카부 베르데”라고 생각해 “카부 베르데”라 부르며 지도를 작성했고 유럽에 무인도를 알렸습니다. “카부 베르데”는 각 유럽어로 불렸으며 스페인어로 “까뽀 베르데”, 프랑스어로 “깝 베르”, 영어로 “케이프 베르드“로 불렸습니다. 또 러시아와 슬라브 국가들은 “까뽀 베르데“라 불렀고 한국이 그 발음을 받아 “카보베르데”라고 발음합니다.


  • 기니비사우: 헤푸블리카 다 기네비사우
기니비사우 카니발
기니비사우 카니발

서아프리카 남단 만은 예로부터 현지인에 의해 기니 만이라고 불려왔습니다. 아랍인은 그곳을 “기니야”라 불렀고 이란에 “기네”로 알려지며 “기네”가 튀르키예와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기네”를 “기네아”, “기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은 “기네아”라 불렀으며 러시아는 ”기네야“, 프랑스와 포르투갈은 ”기네“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열며 대서양에 접한 서아프리카 연안을 처음으로 식민지 개발했는데 그곳을 기니 만이라고 생각해 “기네비사우”라고 불렀습니다. 그 발음이 현지에 전해져 “기네비사우”가 되었고 프랑스어로 “기네비소”, 영어로 “기니아비소“, 러시아어로 “기니야비사우“로 불렸습니다.



  • 기니: 레푸블리크 드 기네
기니 쿠데타
기니 쿠데타

포르투갈이 기네비사우를 식민지로 건설하자 프랑스 식민제국은 그 남부를 식민지 항구로 개발하며 “기네”라고 발음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기네비사우”에 이은 “기네”를 기니 만을 부르던 그들 발음으로 불렀습니다.



  • 시에라리온: 리퍼블릭 옵 시에라리온
시에라리온 산과 프리타운
시에라리온 산과 프리타운

포르투갈 탐험가 페투르 드 신드라는 기니 만으로 가던 중 웅장한 산맥을 발견했고 그 산맥을 포르투갈어로 사자의 산이라는 뜻으로 “세라 데 레오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산은 “세라 데레오아”로 유럽에 알려졌으며 대영제국 동인도회사가 그 지역에 상륙해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라 데 레오아”를 “세라 레오아”로 줄인 후 영어 발음으로 “시에라 리온”이라고 불러 “시에라리온”이 지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는 “세라 데 레오아”보다 “시에라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이를 각국 발음으로 불렀습니다.



  • 라이베리아: 리퍼블릭 옵 라이베리아
악마 가면 축제

북아메리카가 발견되고 수많은 서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이 북아메리카로 팔려가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북아메리카의 한 독립국인 미국은 노예 해방을 두고 남북전쟁을 벌였고 뿌리깊은 흑인차별주의를 가진 미국 정부는 미국식민협회를 건설해 아프리카 노예들을 다시 서아프리카로 보내 그들끼리 살라는 취지로 서아프리카 기니 만으로 역이민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아프리카 노예들도 뿌리깊은 차별정책에 반발해 그들끼리 자유로운 땅으로 가기를 원했고 수많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서아프리카 기니 만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땅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라이베리아"로 발음했으며 미국 보호 하에 "라이베리아"를 건국하고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어권을 제외한 국가들은 이를 "리베리아"라고 불렀습니다.



  • 코르디부아르: 레퓌블리크 드 꼬뜨디부아르
아비장
아비장

기니 만에 살던 현지인들은 유럽인들이 식민지 항구를 건국하자 금과 아프리카 코끼리 상아를 수출품으로 유럽 상인들과 무역했고 코끼리 상아 무역으로 유명했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식민제국은 세네갈부터 서아프리카 해안지대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상아 무역이 활발했던 기니 만 중심지를 프랑스어로 상아 해안이라는 뜻을 가진 "꼬뜨 디부아르"라 불렀습니다. "꼬뜨 디부아르"는 프랑스어로 지정하기 전 이미 세계적인 상아 무역지로 유명했고 유럽 식민제국들은 이미 그곳을 상아 해안이라는 뜻으로 불렀습니다. 포르투갈은 "꼬스따 두 마르핑", 스페인은 "꼬스따 데 마르필", 대영제국은 "아이보리 코스트", 독일은 "엘펜바인퀘스테", 네덜란드는 "이부르쿠스트", 러시아는 "베렉 슬라노보이 꼬스띠"라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튀르키예)는 "피디시 사힐리"라 불렀습니다. 스와힐리어는 프랑스어 "꼬뜨디부아르"를 그대로 받아 발음했고 아랍은 프랑스어인 "꼬뜨디부아르"를 받아 "꿋디푸아르"라 발음했으며 중국 역시 프랑스어 발음을 받아 "커터디와"라 발음했습니다.


  • 부르키나파소: 뷔르키나파소 (프랑스어) / 베르키너패소 (모시어, 풀라어, 디울라어 등 현지어)
보보 디우라소 모스크
보보 디우라소 모스크

말리 제국의 지배를 받다 현지인 모시인들이 모시 제국을 건국해 맹위를 떨쳤지만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때 프랑스 식민제국은 모시 제국 지역을 프랑스어로 볼타 강 상류라는 뜻으로 "오트볼타"라고 불렀으며 이를 모시어로 번역하면 "부르키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디울라어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파소"를 "부르키나"와 합쳐 볼타 강 상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자 모시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들이라는 뜻을 가진 "베르키너패소"로 국명을 변경해 독립 후 "베르키너패소"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모시인들은 발음은 "베르키너패소"로 하되 표기는 프랑스 알파벳으로 "뷔르키나파소"라고 표기했으며 "뷔르키나파소"를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읽으면 "부르키나파소"가 됩니다. 그래서 "부르키나파소"가 유럽에 알려졌고 프랑스와 포르투갈에서는 "뷔르키나파소", 다른 유럽 국가들은 "부르키나파소"라고 읽었습니다.


  • 가나: 리퍼블릭 옵 가나
아드와 춤

서아프리카에 살던 소닝케인들은 강력한 전사들을 양성했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가나 제국을 건국했습니다. 여기서 "가나"는 소닝케어로 전사들의 왕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가나 제국은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강한 제국으로 맹위를 떨쳤고 송가이 제국 등 여러 제국들이 등장하며 가나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가나"라는 명칭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기니 만 해안지대는 황금이 많이 나 황금 해안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 아랍인들은 그곳을 아랍어로 황금해안이라는 뜻을 가진 "알사힐 알다하비우"로 불렀습니다. 이 "알사힐 알다하비우"는 유럽으로 전해져 황금 해안으로 알려졌고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황금이 넘쳐나는 지역을 찾아 모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가나 해안은 오랫동안 포르투갈어로 "꼬스따 두라다", 스페인어로 "꼬스따 도라다", 프랑스어로 "꼬뜨 도레", 네덜란드어로 "구덴 쿠스트", 영어로 "골드 코스트"로 불렸습니다. 이는 대영제국이 그 해안 주변을 식민지배할 때도 이어져 "골드코스트"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1960년 독립 후 소닝케인들은 자랑스러운 가나 제국의 후예라는 것을 알리며 "가나"라는 명칭을 부활했고 "가나"가 황금 해안을 대체하는 명칭이 되었습니다.


  • 토고: 레퓌블리크 토갈레스
토고 폭포
토고 폭포

가나 해안과 기니 만 사이에 수많은 강이 집중적으로 모이는 습지대가 존재합니다. 그 좁은 습지대를 흐르는 큰 강만 톳지 강, 오티 강, 모노 강, 지오 강 4개 강이며 작은 강까지 합치면 21개가 넘고 또 거대한 호수도 존재합니다. 이 습지대에 산 에웨이인들은 그 지역을 물가라는 뜻으로 "토고"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아랍인들이 받아 "투주"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이 흘러 19세기 그곳을 식민지배한 독일인들은 강으로 뒤덮인 습한 곳에 놀랐고 현지인들이 부르는 "토고" 발음을 받아 "토골란트"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토골란트를 프랑스와 대영제국에게 넘겨줬고 프랑스는 "토골란트" 발음을 프랑스 발음인 "토골랑드"라 부르고 대영제국은 "토골랜드"라 불렀습니다. 이때 "토골랑드" 면적이 더 넓어 더 많은 에웨이인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토골랑드"는 시간이 지나 프랑스 식 지리 명칭인 "토갈레스"로 불렸습니다. 그 발음이 지금도 불려 현지인들은 "토갈레스"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은 옛 명칭인 "토고"라 불렀고 "토고"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 베냉: 레퓌블리크 뒤 베냉
베냉 부두교 축제
베냉 부두교 축제

17세기 기니 만의 폰인들은 다호메이 왕국을 건국했으며 유럽 상인들에 다른 부족 사람들을 노예로 파는 노예무역으로 성장했습니다. 폰인들은 건국 설화로 추장이 도발하자 추장 배를 가르고 나라를 건국했다며 "단소메"라 불렀고 "단소메"가 "다호메이"로 발음이 변해 불렸습니다. "다호메이"는 유럽으로 가 "다호메이", "다호메이아", "다호메이야"로 불렸고 아랍은 "다후미"라 불렀습니다. 이후 프랑스 식민제국이 다호메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꼴로니 뒤 다호메이"(프랑스령 다호메이)로 불렀으며 1960년에 "레퓌블리크 뒤 다호메이"로 독립했습니다. 그러다 1975년 사회주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정권을 잡은 마티외 케레쿠는 나이지리아 지역에 등장했던 베닌 제국의 이름을 따 국명을 "베냉"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에 스스로를 "베냉"이라 알렸으며 소련은 프랑스어 발음인 "베냉" 대신 러시아어 발음인 "베닌"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은 "비닌"이라고 불렀고 미국과 영국은 "베닌"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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