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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

나라별 명칭과 다른 이름-동아프리카 편

by 롱카이 2023.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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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티오피아: 예이티오피야 페데랄라위 디모크라시야위 리페빌리크
안드로메다 공주
안드로메다 공주

고대 그리스 신화 중 페르세우스 신화에 나오는 안드로메다 공주는 흑인 공주이며 안드로메다 공주는 나일강 상류 아이티오피아 나라의 공주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이티오피아"는 검은 얼굴을 한 사람들의 땅이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아프리카 중부에 살던 흑인들을 가리키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는 나일강 상류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은 모두 "아이티오피아"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이 로마제국으로 건너가 "아이티오피아"로 유럽에 알려졌습니다. 독일은 이 발음을 유지하며 "아티오피엔"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는 "에티오피아"로 알려졌습니다. 프랑스는 "에티오피아"라고 불렀고 그 발음이 유럽 전체로 퍼져 스페인과 이탈리아, 서슬라브인들은 "에티오피아"라고, 러시아는 "에피오피야"로 알려졌습니다. 튀르키예 역시 "에티오피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발음이 이란으로 가 "에티오피아"가 되었고 인도에서는 "이티오피야"라고 발음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커피
에티오피아 커피

한편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한 아랍인들은 예로부터 에티오피아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그들이 아비시니아 제국을 건국했을 때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그 지역을 아비시니아로 알았고 이를 아랍어로 "알하바샤"라고 불렀습니다. 이슬람 제국 시절 "알하바샤"와 "아비시니아"가 동방에 알려졌고 지금 그 발음을 유지하는 중국은 "아사이어비아"라고 부릅니다. 아비시니아 제국 이후 오랫동안 분열되다 19세기에 다시 통일한 그들은 "이투피야"라고 발음했으며 옆에 있던 소말리인들과 티그리냐인들은 이를 받아 "이투비야"라고 부릅니다.

  • 에리트레아: 하게레 에르트라 (티그리냐어) / 다울라트 이리트리야 (아랍어)
에리트레아 군사 퍼레이드
에리트레아 군사 퍼레이드

티그레인들이 살던 해안지역은 오랫동안 에티오피아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의 암하라인들은 그곳을 항구도시로 개발한 후 "에리트리야"라고 지명으로 불렀습니다. 시간이 지나 오스만 제국이 "에리트리야"를 차지했고 "에리트레"로 불렀으며 티그레인들은 이를 "에르트라"로 불렀고 아랍인들은 "이리트리야"라고 불렀습니다. 아랍어 "이리트리야"는 이탈리아로 가 "에리트레아"로 불렸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과 대영제국은 그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하며 "에리트레아"를 유럽과 세계에 알렸습니다.

  • 남수단: 리퍼블릭 옵 사우스 수단
남수단군
남수단군

나일강물이 나오는 상류 지역은 건조한 사막이 아닌 우거진 밀림지대로 늪지대에 악어 등 포식동물들이 강을 점령한 위험천만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상류를 탐험하는 정도에서 그쳤고 그 지역에 살던 수많은 부족들도 이집트와 간간히 교류하며 그들 문화 전통을 지켰습니다. 허나 고대 이집트가 쇠퇴하면서 교류는 끝이 났고 밀림 지대는 각각 마을에 부족들이 사는 곳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잊혔습니다. 그러다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지만 지배하지는 않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마스르 맘라카국(이집트 왕국)은 대영제국 식민지배를 받으며 남수단 지역도 대영제국 일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대영제국은 밀림 뿐인 그곳에 지배 행정을 할 영국인 몇명을 보낼 뿐 수단 지역으로 규정하고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수단 내전
남수단 내전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이 수단을 독립시키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막 기후에서 오랜 시간동안 이슬람 문화와 아랍 문화가 정착한 수단과 우거진 밀림 속 수많은 부족들이 서로 왕래도 안하며 살던 밀림 지대 문화가 너무도 달랐습니다. 허나 수단은 대영제국이 그어놓은 영토를 모두 지배하려고 했고 밀림 부족들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부족은 연합해 수단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고 수단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남수단의 부족들은 서로를 묶고자 유일한 공용어인 영어로 "사우스 수단"을 지정한 후 국제사회에 이를 알렸고 2011년 7월 9일 정식 독립했습니다. 허나 독립한 후 여러 부족들은 지배자 자리를 놓고 지금도 내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 우간다: 잠후리야 우간다 (스와힐리어) / 리퍼블릭 옵 우간다 (영어)
우간다
우간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반투인들은 사하라 이남 다양한 곳에 살았고 남수단 밀림 아래에는 간다인이라는 반투계 민족이 처음 정착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간다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부간다"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부간다 왕국을 건국해 지배했으며 "부간다"를 주변에 알렸습니다. 이를 후에 등장한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인 반투인들이 스와힐리어로 "우간다"라고 불렀습니다. 그 사이 간다인들은 "부간다"를 "바간다"라고 불러 지금 그들은 "바간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허나 간다인들은 반투계 민족으로 더 큰 개념인 반투인들이 쓰는 "우간다"가 반투인과 다른 아프리카인에게 더 널리 알려졌으며 이슬람 세계에도 "우간다"로 알려졌습니다. 19세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에서 온 사람들도 "우간다"를 받아 "우간다"라고 불렀습니다.


  • 케냐: 잠후리야 케냐
케냐 산
케냐 산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킬리만자로 산 북부에는 아프리카에서 두번째로 높은 케냐 산이 존재하며 그 산 주변 지역을 예로부터 "케냐"라고 불렀습니다. 이 "케냐"는 스와힐라어로 "케냐"라고 불려 아랍에 "키니아"로 알려졌습니다. 아랍은 이슬람과 함께 이슬람 세계에 "키니아"로 알렸고 이란에 "키니예", 인도에 "키니야", 튀르키예에 "키냐"로 알렸습니다. 이 발음은 남슬라브와 동슬라브로 건너가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이 "키니야", "키니아"로 발음했습니다. 반면 그 지역을 식민지로 삼은 대영제국은 직접 "케냐"라는 발음을 들었고 "케냐"라고 표기했으며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에 "케냐"라는 발음을 공유했습니다. 때문에 서유럽과 서방은 "케냐"라고 발음하고 동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은 "키니아", "키니야"라고 발음합니다.


  • 탄자니아: 잠후리야 뭉가노와 탄자니아
잔지바르
잔지바르

인도아대륙 서부 해안에서 출발한 인도양 해류는 인도아대륙 서부에서 이란과 아라비아 반도 동부 해안을 거쳐 아프리카의 뿔을 지나 최종적으로 동아프리카 중앙 해안에 다다른 후 적도를 따라 먼 바다로 이동합니다. 때문에 인도 서부 해안에서 배를 띄우면 해류를 따라 그 지역에 도착합니다. 예로부터 향신료가 많았던 그 지역은 인도와 이란 상인들이 무역활동을 했던 지역으로 이란 사람들은 흑인의 해안이라는 뜻으로 "잔지바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잔지바르"는 인도, 이란, 아랍에 알려져 아프리카에서 유명한 지역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또 유럽으로도 전해져 "잔지바르", "잔지바리아"로 알려졌습니다.

탕카니카 호수
탕카니카 호수

또 잔지바르에서 서쪽 내륙으로 이동하면 바다처럼 큰 호수가 등장하는데 호수 주변에 살던 반투인들은 스와힐라어로 평야처럼 넓다라는 뜻으로 "탕카니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 호수 이름은 "탕카니카"로 불렸고 그 호수 주변 지역도 "탕카니카"라고 불렸습니다. 정확히는 탕카니카 호수 동부 평원 지대를 "탕카니카"라고 불렀으며 서부 지역은 밀림이었기에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킬리만자로 산
킬리만자로 산

이 지역은 오랫동안 반투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잔지바르 항구를 포르투갈 제국이 식민지배하다 오만 제국에게 넘어가고 후에 잔지바르 술탄국으로 독립하다 대영제국 지배를 거쳐 독일제국 식민지인 독일령 동아프리카가 되었습니다. 이때 독일제국은 잔지바르 지역 외 탕카니카 호수까지 지배한 최초의 국가였고 독일제국은 잔지바르 해안에서 탕카니카 호수까지 이르는 식민지를 어떻게 부를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탕카니카 호수 동부 내륙 지역도 "탄카니카"라고 부르는 것을 안 후 식민지를 "탄카니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독립 전까지 그 지역은 "탄카니카"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1960년 탄자니카는 독립했고 "탄카니카"와 "잔지바르"는 엄연히 다른 지명이었기에 "탄카니카"의 탄-과 "잔지바르"의 자-를 합쳐 "탄자니아"로 국명을 변경했고 전세계는 탄자니아 독립을 축하하며 "탄자니아", "탄자나", "탄자니야"라고 불렀습니다.


  • 르완다: 레푸블리카 유 르완다
르완다 고릴라 숲
르완다 고릴라 숲

탄자니카 호수 동부 밀림은 여러 부족들이 지배했으며 18세기 니기냐 부족이 르완다 왕국을 건국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제국은 19세기에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르완다 왕국을 포함시키고 르완다 왕국을 간접지배했습니다. 독일제국은 르완다 왕국의 정체성은 유지시켰고 "루완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탄자니카 호수 서부 작은 왕국을 "르완다", "루완다"로 불렀으며 "르완다" 어원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 덕에 르완다는 "르완다", "루완다", "르완댜"로 불리고 있습니다.


  • 부룬디: 레푸블리카 유부룬디
부룬디 악기 공연
부룬디 악기 공연

16세기 투치족들은 부룬디 왕국을 건국했습니다. 그리고 부룬디 왕국은 부족 왕국 상태를 유지했고 독일제국과 벨기에 식민제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도 부룬디 왕국은 유지시키며 "부룬디"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 말라위: 리퍼블릭 옵 말라위
물란제 산
물란제 산

탄자니카 호수 남부로 강을 따라 이동하면 말라위 호수가 등장합니다. 이는 그 호수 주변에 살던 마라비족의 이름에서 딴 것으로 마라비족은 현 난쟈족입니다. 여튼 그 지역은 예로부터 "마라비"라고 불렸고 반투족들은 스와힐라어로 "니아사"라고 불렀습니다. 마라비족들도 그 지역을 "마라비"라 불렀으며 후에 "말라비"로 발음이 변경되었습니다. 허나 19세기 대영제국은 말라위 호수 주변을 식민지배했고 스와힐라어인 "니아사"에서 따 "니아살랜드"라고 불렀습니다. 그 발음이 유럽과 세계로 퍼졌고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 식민제국 시기에 그 지역은 "니아살랜드", "니아살란트", "니아살리야" 등으로 발음되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 독립했고 옛 지명인 "말라비"를 영어식 발음으로 한 "말라위"를 국명으로 격상시켰으며 식민시대를 끝낸 미국과 소련 주도로 전세계에 "말라위", "말라비"가 새로 알려져 지금까지 그 발음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 모잠비크: 헤프블리카 드 무삼비키
모잠비크
모잠비크

7-8세기 아랍 상인들은 적도를 넘어 적도 이남 해안으로 진출했고 아프리카 남동단에 한 항구를 지어 그곳 현지인과 무역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랍 상인 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무사 음비키였고 그 사람을 기리며 항구와 해안지역을 "무사비키"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아랍어로 "무사비키"라고 하며 스와힐리어로 "무숨비지"로 불렀습니다. 그 항구는 그 지역을 대표했으며 현지인 마쿠아인들은 “무삼비키”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이 지나 포르투갈이 그곳을 식민지배했고 “무삼비키”를 받아 “무삼비키”라고 부르며 유럽에 이를 알렸습니다. 스페인은 “무삼비카“라 불렀고 프랑스은 ”무삼비크“라 불렀으며 독일은 ”무잠비크“라 불렀습니다. 이 발음이 대영제국으로 넘어가 ”무잠비크“라 불렸으며 대영제국은 이를 전세계에 알려 영어권 국가들에 ”무잠비크“라고 알렸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에 ”무삼비크“로 알렸습니다.


  • 코모로: 알라이티하드 꾸무리
코모로 모스크
코모로 모스크

인도양 무역을 주도하던 아랍인들은 적도 남부 동아프리카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제도를 보고 달이라는 뜻을 가진 “까마르“, 혹은 ”꾸무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랍어 “꾸무르“는 이슬람과 함께 그 섬에 사는 코모로인들에게 전해져 “꾸무리”로 발음되었습니다. 이를 프랑스가 식민지배하며 “꼬모로“로 불렀고 그 발음이 유럽에 전해져 “꼬모로”, “코모로”로 알려졌습니다.


  • 세이셸: 레피블리크 세셀
세이셸
세이셸

인도양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무인도는 그동안 사람들이 몰랐다 바스코 다 가마가 그 섬을 발견하며 유럽에 알려졌습니다. 유럽 탐험가들은 그 신비로운 무인도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대영제국 동인도회사가 그 섬을 찾아 지도에 표기하며 위치가 알려졌고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그 섬을 차지한 후 "세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대영제국 동인도회사는 항의했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세셀 제도를 넘겨줬고 대영제국 동인도회사는 “세이셸”이라 불렀습니다. 작은 낙원인 그 섬은 유럽과 대영제국 식민지를 제외한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세셀”로 알려졌으며 유럽 외에는 영어 발음인 “세이셸”로 알려졌습니다.


  • 마다가스카르: 레포블리칸니 마다가시카라
알락꼬리여우원숭이
알락꼬리여우원숭이

로마제국의 지리학자 포톨레마이오스는 아프리카 지리를 탐구하며 아프리카 동남단에 있는 큰 섬을 “메누티아스”라고 표시했습니다. 이는 마다가스카르 섬인지 잔지바르 섬인지 불명확하지만 “메누티아스”라는 섬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이후 마르코 폴로가 소말리아 모가디슈를 “메누티아스”로 착각해 “메누티아스”가 실제로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그 섬을 실제로 발견했으며 ”미누티야스“라 부르며 무역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섬에는 여러 부족이 살았지만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한 이들은 말라가시인들로 그들은 그들 땅을 “말라가시카라”라고 불렀습니다. 이 발음이 시간이 지나 ”마다가시카라“라 되었습니다.

바오밥나무
바오밥나무

말라가시인들이 “마다가시카라”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아랍 세계에 알리자 아랍 상인들은 “미누티아스”를 버리고 “마다가시카라”라고 불렀습니다. 또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반투족에게도 발음이 전해져 스와힐라어로 “마다가스카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프랑스가 섬을 식민지배하며 “마다가스카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전했고 유럽세계에 ”마다가스카르“로 알려졌습니다.


  • 모리셔스: 레푸블릭 모리스 (모리셔스 크레올어) / 리퍼블릭 옵 모리셔스 (영어) / 레푸블리크 드 모리스 (프랑스어)
모리셔스
모리셔스

서인도양 무인도는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먼저 발견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발견해 항구로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인들은 오라녀 공작 마우리츠 이름을 따 그 섬을 “마우리츠”로 불렀습니다. 이 발음이 라틴어인 “마우리티우스”로 번역되어 유럽 각국 발음으로 불렸습니다. 프랑스는 “모리스”로 불렀고 대영제국은 “모리셔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항구를 관리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를 끌고 가 정착시켰고 이들로 부족해 인도 타밀인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무인도였던 섬은 아프리카인과 인도인 혼혈인 모리셔스인이 탄생했고 그들은 아프리카 토착어와 타밀어, 프랑스어, 영어가 섞인 모리셔스 크레올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고 평상시 프랑스어 위주로 사용했기에 프랑스어 발음인 “모리스”를 택해 “모리스”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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