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문법으로 유지된 고려高麗

청동기 시대와 고대 초창기 문명은 지도자의 말이 곧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어도 판단이 완벽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한 말을 기억하고 뱉은 말을 책임져 백성들의 신뢰를 끝까지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또한 인성이 좋지 않은 지도자는 권력을 남용해 말을 수시로 바꿔가며 신뢰를 내팽겨쳤지요. 그리고 그런 지도자는 대부분 부하의 반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며 아무리 하늘이 선택한 지도자라 해도 독단적인 선택으로 법을 만들고 유지하기란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양한 사람의 검증을 거쳐 문자로 기록해두고 지키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지도자 개인은 그 법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인 것은 유지하고요.

여튼 고려高麗 역시 성문법을 기본 통치 법률로 정했습니다. 대표적인 성문법은 고려율高麗律로 당唐의 법률인 당률唐律과 송宋의 송형통宋刑統을 참고하여, 고려高麗의 실정에 맞게 가려 뽑아 독자적으로 제정한 성문 형법입니다. 내용은 주로 범죄와 처벌에 관한 내용을 담은 71개조의 핵심 법조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보조법률도 있었는데, 고려율高麗律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왕이 수시로 내린 명령인 격格, 식式, 교령敎令 등이 보조 성문법으로 함께 활용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건국자인 태조 왕건의 명인 훈요십조訓要十條였지요.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이후 황제들도 함부로 어기지 못한 최고급 법에 속했습니다. 태조 왕건 외에도 선대 황제들이 세운 법과 제도인 조종조제祖宗朝制 역시 막강해 황제가 함부로 국정을 유린하지 못하게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습니다.

다만 이는 황실과 귀족, 승려 등 지배계층을 대상으로 한 법률로 일상의 법은 대부분 관습법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상속, 혼인, 토지 매매, 노비 소송 등 일상적인 민사 사건에 대해서는 정형화된 성문법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신 각 지역에서 오랜 기간 내려온 전통적인 관습법에 따라 재판하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렇기에 지방 향리鄕吏의 권한이 막강했지요. 향리鄕吏는 정치로 보면 고려高麗 공무원 중에서 말단에 속했으나 마을 사람에게는 관습법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막강한 실세였습니다. 향리鄕吏가 법을 남용해도 중앙에서 특별히 눈여겨 보지 않는 이상 막을 방도가 없었지요.
- 범죄와 형벌

감시와 추적 장치가 발달한 현대는 CCTV와 생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범죄 경위를 빠르고 정확하게 복원하고 대부분 진범을 빠르게 체포할 수 있습니다. 그 진범을 처벌하는 건 둘째치고, 체포 자체는 쉽게 하는 세상이지요. 하지만 그 데이터와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범죄를 방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범죄를 저지른 범인에게 최대한 무거운 형벌을 내리고,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줘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범죄를 최대한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었지요. 때문에 고려율高麗律에서도 형벌을 비중있게 다뤘습니다.

고려高麗의 형벌은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가장 가벼운 벌은 태형笞刑으로 회초리로 넓적다리나 엉덩이 둔부를 매질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성의 경우 바지를 벗겨 맨 살이 드러나게 한 뒤 매질하고, 여성의 경우는 속치마만 입힌 뒤 차가운 물을 뿌려 옷과 피부가 닿게 한 뒤 매질했었습니다. 허나 간통 같은 중죄인 경우 여성도 얄짤 없이 하의를 벗기고 매질했다고 하네요. 허나 고려高麗 때는 여성에 대한 태형笞刑 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태형笞刑이 회초리로 매질하는 것이었다면, 장형杖刑은 거대한 널판지로 패는 것이었습니다. 사극에 많이 나오는 장면이지요. 사극과의 차이점이 있는데, 사극의 배경인 조선朝鮮 때는 엉덩이를 때렸다면, 고려高麗 때는 장형杖刑으로 등을 때렸습니다. 그것도 60회에서 100회를 때렸으니 장형杖刑을 받고 하반신 마비가 되거나 전신 마비에 걸렸고 심하면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朝鮮 때 죽지는 말라고 엉덩이를 매우 치는 것으로 바뀌었지요. 그럼에도 하반신 마비는 기본이었고 가끔씩 사망자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도형徒刑은 강제 노역질로 판결에서 정해진 기간 만큼 무보수로 노역을 지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형벌刑罰이었기에 매우 위험한 일에 동원했지요. 마치 소련의 굴라그ГУЛаг이나 북한의 로동교화소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보통은 1년에서 3년 간 진행되었으며 교량을 놓는 일에서 물길을 헤치며 기단석을 놓는 일이나 땅굴의 맨 앞에서 굴을 캐며 나아가는 등 목숨이 위험한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 보다 더 무거운 유형流刑은 흔히 유배라 불리는 일로 고려高麗 때는 귀향歸鄕이라는 명칭으로 많이 쓰였습니다. "[의식주: 도시와 촌락] 귀족들의 사유지 장원" 편에서 다뤘지만 유형流刑은 지방에서 상경해 개경開京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귀족들의 재산과 권력, 미래를 모두 빼앗고는 태어난 고향에 내쫒는 형벌이었습니다. 때문에 유형流刑은 사실상 정치적 숙청 수단으로 사용되었지요. 황권에 대놓고 도전해 국정을 농단한 경우는 고향도 아닌 외딴 섬이나 북방의 추운 황무지로 쫒아버리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인 사형死刑은 단연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고려高麗 때는 사약賜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朝鮮과 달리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를 배려하지 않고 닥치고 몸을 훼손했습니다. 방법은 목을 조르는 교형絞刑으로 고려高麗 때는 이 벌이 그래도 몸을 온전히 유지시키는 자비로운 사형死刑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죄는 부월斧鉞(큰 도끼)이나 대도大刀로 목을 참수하는 참형斬刑에 처했습니다. 참형斬刑 대상은 반역죄나 부모를 살해한 죄, 군대에서 무단 탈영하는 경우였습니다. 허나 살생을 금지하는 고려高麗는 최대한 사형死刑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청官廳에서 한 번, 어사대御史臺에서 한 번, 상서형부尙書刑部에서 한 번 총 세 번의 재판을 하는 삼복제三覆制를 시행해 세 번 모두 사형死刑이 선고될 때만 집행했습니다. 그마저도 집행을 꺼려해 감옥에 가두어 놓다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 때 석방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 범죄자를 묶어 놓은 감옥

형을 집행하는 동안이나 체포 후 형을 준비하는 동안 죄수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고려高麗 때 감옥은 거칠고 큰 돌을 쌓아 둥글게 담장을 쌓고는 안에 작은 집을 만들어놓은 원옥圓獄이었습니다. 이 때 최소 건물은 두 개 이상으로 만들었는데, 남성 죄수와 여성 죄수를 분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튼 높고 거친 담장 안에 들어간 죄수는 매우 좁은 감방에 갇혔습니다. 죄수를 위한 냉난방 시설은 물론 환기 시설 따위는 없었지요. 심지어는 위생 시설조차 없어 용변을 방 한구석에서 보고 방치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감옥에서 죽어간 경우도 많았습니다.

또한 감방에 순순히 넣지 않았지요. 백정이나 노비 남성은 목에 크고 무거운 나무 널빤지인 가枷, 나무로 만든 수갑인 추杻, 발목에 채우는 나무 족쇄인 질桎로 움직임을 봉쇄당했습니다. 이는 탈출 방지를 위함이었지요. 백정이나 노비 여성은 힘이 약하기에 이런 장비를 따로 달지 않았고, 귀족의 경우는 체면을 위해 채우지 않았습니다. 웃긴 것은 고려高麗는 불교 사회였기에 각종 축제나 길한 날이면 범죄자를 석방해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형벌을 기다리는 범죄자들도 길한 날의 사면령을 받아 감옥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았지요. 이것이 심해 정작 죄인을 잡아 넣는 감옥이 텅텅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형벌刑罰 집행 횟수도 많지않았지요. 국가에 대한 반역이나 정도는 되어야 끝까지 감옥에 남아 형벌刑罰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 최대한 신중을 가한 재판

또한 살생을 금지하는 풍조와 그동안 얻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재판을 신중하게 치뤘습니다. 범죄 발생과 소송 제기재판은 국가 체제를 뒤흔드는 대역죄나 살인 같은 중범죄의 경우 국가가 직접 수사에 착수했고, 토지나 노비 분쟁, 폭행 같은 일반 사건, 즉 민사는 피해자가 직접 관청官廳에 고발장인 원상牒呈을 제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수사관은 피의자의 진술, 표정, 숨소리, 눈빛, 언변 등 다섯 가지 정황을 먼저 면밀히 살피며 물증과 목격자의 증언을 확보해 종합해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 때 고문은 최대한 하지 않았으나 정황과 증거가 확실한데도 피의자가 범행을 완강히 부인할 때에만 비로소 법적 허용 범위 내에서 장형杖刑을 통한 고문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30번 이내에 정해진 규격의 몽둥이로 다리를 때리는 신장訊杖으로 고문법이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범인이 죄를 자백하거나 정황을 확보하면 판결을 내렸습니다. 경범죄는 수령守令이나 향리鄕吏 등이 판결을 내리며 즉결심판을 받았지만, 중범죄의 경우 윗 기관으로 이송되어 삼복제三覆制에 따라 형벌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삼복제三覆制의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습니다. 범죄자는 감옥에 갇힌 체 지내다가 황제가 승인하면 그제서야 집행되었지요.
- 사법권 남용과 비리

어느 시대든 감시와 견제가 약해지면 비리가 횡행해집니다. 고려高麗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요. 원 지배기 이전 고려高麗는 더 심했습니다. 토착 향리鄕吏의 권력을 어느 정도 용인한 사회였기에 중앙은 몰라도 지방에서는 향리鄕吏의 힘이 강했지요. 이는 고려高麗 때 막 과거科擧가 도입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소수의 관료를 뽑았기에, 자기 이해관계가 아닌 황제에게 충성하는 지방관을 전국 모든 곳에 보낼 정도로 충분히 많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소수의 관료를 지방관으로 보내고 향리鄕吏를 감시하게 했지만 향리鄕吏들을 일일이 감시하기 어려웠지요. 그걸 향리鄕吏가 이용했습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힘이 강한 시절에는 향리鄕吏들이 눈치를 봤지만 전란이나 반란, 각종 혼란으로 중앙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면 향리鄕吏는 자기 구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밉보인 백정은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규정보다 더 심한 형량을 지워 핍박했지요. 또한 지역의 마름 등 유력한 세력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의 핍박을 방임하거나 형량을 줄이거나 심지어는 사면해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는 국가 질서가 무너진 무신정권 때 더 심해져 향리鄕吏가 부하를 사병처럼 부리며 법률을 어기고 때려 죽이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다행히 원 지배기 때 과거科擧로 전국에 파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방관이 양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원 지배기 이후 고려高麗 조정은 전국에 순차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했고, 토착 향리鄕吏는 관청官廳에서 지방관 직속 부하로 일했습니다. 그것이 수령守令과 향리鄕吏의 관계로 조선朝鮮 때는 법률로 고정시켜서 수령守令 밑에 향리鄕吏들이 다양한 보직으로 근무하는 형태가 완성되었습니다. 비로소 중앙의 법률이 지방 전역에 적용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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