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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종교 사회宗敎司會

[종교 사회宗敎司會 : 유학과 교육] 한자문화권에 퍼진 성리학

by 롱카이 2026.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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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학儒學으로 하나 된 중원

간지나는 불상으로 유명한 요나라 관음상, 요는 독실한 불교 사회였다

오히려 이방인보다는 중원 국가에서 유학儒學이 불교佛敎의 자리를 밀어내고 빠르게 자리잡았습니다. 연운 16주를 차지해 한족을 흡수한 요遼는 북방은 유학儒學을 받아들였으나 거란족까지 유학儒學이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요遼는 통치방법으로 거란족의 유목생활을, 남방은 한족의 정주생활을 분리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유목민족 특유의 정복 정신이 있었고, 불교佛敎에 심취한 국가였기에 유학儒學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금은 빠르게 중화질서에 들어가며 유학을 진흥시켰다

대신 그 자리를 빠르게 차지한 금金은 빠르게 유학儒學을 받아들이고 과거科擧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며 걸출한 유학자를 배출했습니다. 금金도 동일하게 훈고학訓詁學을 받아들였지만 달달 외우기보다는 그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중기 때부터는 조병문 같은 명성 높은 유학자가 나타나 남송南宋의 유학 학풍을 비판하며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독자적인 유학 학문을 만들 정도였습니다. 또한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를 보호하고 공자의 후손을 극진히 대접했지요.

송의 제도를 벤치마킹한 서하

비단길의 요충지를 차지한 서하西夏 역시 유학儒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질서를 세우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송宋의 통치 이념과 수단, 그리고 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그 과정에서 유학儒學과 과거科擧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때문에 서하西夏는 불교佛敎와 유학儒學 둘이 주류인 국가였습니다.

 

 

 

  • 여전히 불교佛敎가 주류인 한자문화권

삼교합일로 유학이 발전한 송과 달리 주변국은 여전히 불교가 강세였다
삼교합일로 유학이 발전한 송과 달리 주변국은 여전히 불교가 강세였다

이렇게 송宋 시기에 문치주의文治主義와 삼교합일三敎合一 하에 유학儒學이 크게 발전하고 중원이 유학儒學에 스며든 반면, 주변국은 여전히 불교佛敎가 강세이던 당풍唐風 질서 속에 있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들 여전히 불교佛敎가 주류인데 선진국인 송宋만 일찍이 유학儒學이 화려한 꽃을 피웠다고 하는 것이 맞지요. 여튼 유학儒學이 한창 훈고학訓詁學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부던히 노력한 북송北宋 시기는 송宋의 유학儒學도 방법을 모르니 대외적으로는 훈고학訓詁學을 유지했습니다.

고려는 주변국 중 유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국가였다
고려는 주변국 중 유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국가였다

그래서 일찍이 과거科擧를 받아들인 고려高麗와 리 왕조 대월李朝大越은 당唐에서 시행한 훈고학訓詁學 기반의 과거科擧를 유지했습니다. 때문에 두 나라에서도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기보다는 무작정 달달 외워서 시험을 보는 형태에 가까웠습니다. 그것이 명경업明經業인데 그래도 다행인 점은 두 나라는 그래도 외국어인 한문漢文을 잘 쓰는 능력을 평가하고자 제술업製述業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동시대의 고려와 마찬가지로 대월도 궁궐 안에 사찰이 있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 국가였다

허나 그마저도 과거科擧를 꾸준히 한 나라는 고려高麗 뿐, 막 독립한데다 불교佛敎 영향력이 컸던 리 왕조 대월李朝大越은 과거科擧를 몇 번 하다 중단했습니다. 대신에 궁궐 안에 크게 절을 지어 황제가 직접 재사와 각종 불교佛敎 행사를 주관하고, 전국에 절을 후원해 부처의 공덕의 힘으로 나라를 유지하려고 했지요.

헤이안 시대 일본에서 유학은 승려들의 개인적인 교양과 취미 수단에 불과했다
헤이안 시대 일본에서 유학은 승려들의 개인적인 교양과 취미 수단에 불과했다

일본日本은 아예 유학儒學이 승려들의 개인 교양을 위한 학문 정도로만 인식되었습니다. 헤이안平安 시기 일본日本은 백제百濟로부터 훈고학訓詁學을 일찍 접했으나 귀족은 명경도明經道라 불리는 유학 경전 읽고 해석하기 문화를 만들어 귀족들만의 사적인 문화로 고착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천황과 무사, 백성은 유학을 접하지 못해 불교, 그 중에서 선종禪宗을 접하며 불교佛敎의 영향력이 뿌리 깊게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귀족마자 명경도明經道를 버린 이후에는 승려들이 개인 수양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 유학 경전을 읽어보는 수준에서 머물렀습니다.

 

 

 

  • 원元의 질서와 성리학性理學의 전파

원은 대도(현 베이징)에 국자감을 세워 성리학을 장려했다
원은 대도에 국자감을 세워 성리학을 장려했다

이런 균형을 뒤엎은 것은 원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한 몽골은 원元을 건국하고 대륙을 연결하는 유통망을 만들며 중화의 성리학性理學을 주변국에 빠르게 전파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유학자의 조언에 따라 통치 수단으로 유학儒學을 장려했습니다. 물론 사실상 유학자에게 통치 위임권을 준 것이긴 합니다. 여튼 쿠빌라이 칸의 동의 하에 성리학性理學은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먼저 원元의 수도인 다두大都(현 명칭: 베이징北京)에 공묘孔廟와 국자감國子監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의 보고로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곳에서 수학한 유학자를 박사博士로 지정해 기독교인, 무슬림 등 다양한 지식인에게 사서잡주四書雜株를 가르치게 하며 성리학性理學을 멀리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국자감國子監을 중심으로 원元 전역에 서원書院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을 중원 전체로 퍼트렸지요.

성리학을 고려에 유입시킨 안향
성리학을 고려에 유입시킨 안향

고려高麗는 뛰어난 유학자인 안향이 다두大都에 유학해 성리학性理學을 접하고는 주희의 저술을 그대로 필사해 고려高麗에 전했습니다. 안향을 시작으로 이제현, 백이정, 이색 등 유학자들이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며 개념을 잡아갔고, 성균관成均館에서 유생들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쳤습니다. 불교佛敎의 무상無常 개념도 품은 성리학性理學이 등장하자 유학자들은 우주 만물의 법칙을 이기론理氣論으로 해석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며 불교佛敎의 필요성에 의문을 품고 타락한 불교佛敎를 비판하는 눈을 얻었습니다.

몽골 침입을 막아낸 대월은 황권이 강해지고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몽골 침입을 막아낸 대월은 황권이 강해지고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한편 리 왕조李朝에서 쩐 왕조陳朝로 교체된 대월大越은 황실의 일가인 쩐흥다오陳興道가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내며 황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졌습니다. 또한 전쟁 이후에도 원元과 교류하며 성리학性理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쩐 왕조陳朝가 부패로 몰락하고 호 왕조胡朝로 교체되며 전 왕조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으로 숭유억불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짧은 호 왕조胡朝를 이은 후레 왕조家後黎는 문묘文廟를 세우고 본격적인 성리학性理學 국가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막부가 지배하는 군정 시기로 성리학이 관심 받지 못했다
일본은 막부가 지배하는 군정 시기로 성리학이 관심 받지 못했다

한편 일본日本은 여전히 승려들의 개인 수양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중원의 상인이 일본 상인과 승려에게 성리학性理學 경전을 판매해 승려들이 경전을 접했지만 국가에서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 국가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로 군정 시기였기에 유학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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