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치안의 중요성

치안은 사람들이 살면서 길거리를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잠을 잘 때 기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등 사회적 안전함을 의미합니다. 즉, 사회적 신뢰감이 곧 치안이지요. 지금은 사회 안정과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들이 치안 향상 및 유지에 목숨을 겁니다. 허나 황제가 통치하는 왕국 시대에는 조금은 다른 이유로 치안이 중요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왕권 강화와 통치력 입증이었습니다. 중세의 왕들은 아직까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지방의 유력한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왕권에 도전하고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요. 때문에 왕과 황제는 일부러 중앙군을 지방으로 보내 치안을 유지하고 비적 무리를 체포하며 국가가 도적을 소탕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왕이 전국을 지배하고 있으며 백성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통치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좀 현실적인 이유로 조세 확보와 운송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국가 재정은 농민들이 바치는 곡물과 특산물로 유지되었습니다. 치안이 불안하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어렵게 걷은 조세를 수도로 운반하는 과정인 조운선이나 마차에서 도적 떼에게 약탈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에 국가 재정을 위해서라도 치안 유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외세 침략 방어와 내부 안정을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고려高麗는 거란契丹, 여진女眞, 몽고蒙古, 왜구倭寇 등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외부의 적을 막으려면 내부의 혼란부터 다스리는 철저한 내부 치안이 뒷받침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부 치안이 엉망이 된 몽골지배기 이후 왜구倭寇가 창궐할 때 국가는 아무 것도 못하니 고려高麗 백정들이 왜구倭寇에 가담할 정도로 막장이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계급 구조와 신분제 유지를 위함이었습니다. 노비의 반란이나 민중의 봉기는 지배층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으므로, 기존의 사회 질서와 계급 구조를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치안 활동이 중요했습니다.
- 치안을 유지한 군대

개경開京의 치안 유지 수단은 수도를 방비하는 중앙군이 담당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가 경찰 역할도 수행했다는 것이지요. 전기에는 국가 정규군인 2군 6위 중 금오위金吾衛가 수도의 경찰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들은 개경開京 내의 범죄자를 체포하고 포도, 순찰 등의 치안 활동을 전담했습니다. 이 금오위金吾衛 명칭은 당唐의 좌우금오위左右金吾衛에서 따온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의 금오장위군金吾掌衛軍의 기록에는 금오위金吾衛 복식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幞頭圈着, 各隨所方五色 | 복두권착, 각두소방오색". 뜻을 말하면 "복두를 쓰는데, 각 복두는 각기 다른 오색이었다"입니다. 참 애매한 표현입니다. 권착圈着 자체가 모자를 말아서 썼다는 뜻도 되고 돌돌 만 걸 올려 썼다도 되니 중의적 표현이 심히도 많습니다. 이게 한문漢文의 문제점이에요. 묘사가 지나치게 간결하고 중의적 표현이 많아 구체적으로 어땠다는 걸 알기 힘듭니다. 근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아마 말액抹額이라고 복두褓頭 주변에 두르는 굵은 띠가 오색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증거로 당唐 때 말단 군인들은 투구 대신 복두褓頭를 쓰고 붉은 말액抹額을 둘렀거든요. 그리고 그걸 신라新羅와 발해渤海가 따라했는데 위 우용곡 작가님의 일러스트 중 남좌위南左衛와 남우위南右衛 인물이 쓴 모자의 이미 부분이 빨갛지요? 검은 모자褓頭가 복두이고 빨간 띠가 말액抹額입니다.

우용곡 작가님의 그림(출처: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121913405)을 빌려 AI로 창작해본 금오위金吾衛입니다. 각자 도심에서 맡은 구역에 따라 동서남북 중앙을 상징한 오방색五方色의 말액抹額을 두르고 단령團領을 입은 모습입니다. 고려高麗 전기는 아직 송宋이 정체성을 확립하기 전으로 당풍唐風이 강한 시기여서 군인들도 당대唐代 복식으로 입고 다녔을 것입니다. 이 상태로 각 구역을 순찰하며 범죄자를 잡고 밤을 지키며 도시를 지켰을 것 같네요.

허나 무신정권기에 도입하면 정규군이 약화되며 금오위金吾衛도 유명무실해졌고 사실상 무신들의 사병 집단이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최씨 정권기 밤마다 개경을 순찰하며 도적을 잡기 위해 조직된 야별초夜別抄는 훗날 삼별초三別抄의 모태가 되는 핵심 치안·군사 기구였습니다. 원 간섭기 때는 원나라의 영향으로 야별초夜別抄가 사라진 뒤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는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부나 대도시 경찰청과 유사한 역할을 하며 강력한 치안권을 행사했고, 조선 시대 의금부義禁府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한편 지방의 경우는 지방의 관리 치하에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지방으로 파견된 안찰사按察使나 지방의 유력한 입지를 가진 향리鄕吏는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 군사, 치안권을 모두 통합해 쥐고 있었습니다. 군현의 경우 주현군州縣軍이 국방과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주현군州縣軍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거나 성을 지키다가, 도적 떼가 출몰하면 이들을 토벌하는 지방 치안 유지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고려高麗 때는 한밤중에 세작細作(현대 명칭: 간첩)이나 각종 도적, 역모를 꾸미는 반란군을 감시하며 순찰할 병력과 행정력이 부족했습니다. 또한 송宋처럼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길거리에 금덩이를 놔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태평성대인 것도 아니었기에 밤마다 도적이 등장했지요. 때문에 수도 개경開京과 주요 대도시를 중심으로 엄격한 야간 통행금지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당唐과 비슷했지요. 밤이 깊어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종을 쳐서 알렸는데 이를 인경人定이라 불렀고, 다음 날 새벽 통금이 해제될 때 치는 종을 파루罷漏라고 했습니다. 종이 울린 후부터 새벽까지는 일반인의 야간 통행이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길가에 사람들이 없으니 길이나 지붕에서 발견된 사람은 전부 수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오위金吾衛나 야별초夜別抄, 지방이라면 주현군州縣軍이 밤마다 골목을 순찰하고 통금 시간을 어기고 돌아다니다 적발된 사람은 체포되어 엄한 태형笞刑 또는 장형杖刑에 처해졌습니다.
- 고려高麗 당시의 신분증

의식주衣食住의 의복 편에서 저는 옛날에는 신분증이 없었기에 옷차림으로 신분을 증명했다고 했습니다. 고려高麗 때도 이런 풍조는 유지되었지만, 아무래도 옷만으로는 사칭 등의 사기를 방지하지 못했기에 신분증을 만들어 신분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잘 아는 호패號牌는 조선朝鮮에 이르러서야 전국적으로 상시 의무화되었고, 고려高麗는 조금 다른 형태의 신분 확인 수단이 있었습니다.

고려高麗 때는 일반 민중보다는 군인이나 관료에게 신분증을 먼저 지급했습니다. 어대魚袋라는 신분증으로 신분 고하에 따라 금, 은, 동, 구리, 철 등 금속으로 만든 물고기에 직위와 성함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무로 만든 보관함에 넣어 허리춤에 차고 다녔지요. 보통은 나무 보관함에 세겨진 금속 장식을 보고 계급을 판단했습니다.

허나 군인과 관료 뿐만 아니라 일반 백정들도 신분 증명이 필요한 때가 있지요. 거주지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라면 백정은 관청에서 발행한 일종의 통행증인 노인路引이나 행장行狀을 발급받아 감시하는 병사에게 보여주고 통행을 허가받았습니다. 특히 병사들은 도적이나 유민, 도망친 노비를 가려내기 위해 성문이나 나루터에서 이를 철저히 검사했지요. 노인路引이나 행장行狀이 없다면? 일단 관청으로 끌고 가 이름부터 시작해 소속과 사는 지역을 물어보고 조사해 대조하며 심문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도적이나 세작을 가려내고 도심의 안전을 지켜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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