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화장을 선호하던 고려高麗

신라新羅가 삼한일통三韓一通을 이룬 후, 당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려하던 당唐의 화장과 미용 문화도 받아들여 귀부인들이 당풍唐風으로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 문화는 고려高麗에도 이어졌지요.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작성한 서긍은 고려高麗 귀부인은 옅지만 하얗게 분을 발라 피부를 하얗게 보이게 하고, 눈썹을 얇고 길게 그렸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려高麗 때 그려진 미인도를 보면 흰 피부에 눈, 코, 입이 작고 눈썹이 길어 부처님 얼굴과 비슷한 은은한 얼굴로 묘사하고 있지요. 불교佛敎 사회였던 고려高麗다운 미적 기준입니다.

그리고 불교佛敎 사회 자체가 외모지상주의가 강합니다. 불교佛敎 사상에 따르면 내적으로 선한 마음을 가지면 외적으로도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해탈에 이르는 경지에 오르면 몸에서 밝은 빛이 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후광後光이라는 개념이 나왔고, 불교 사회에서 반짝이는 금이나 은, 보석등을 몸에 치장해 햇빛에 받아 반짝이는 연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미의 기준에 맞춰 화려한 화장을 하며 예쁜 얼굴을 과시했고요.

때문에 불교佛敎가 주요 이념이던 나라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화장과 치장을 했습니다. 금붙이가 기본 옵션으로 들어갔고 휘황찬란한 색감의 옷과 화장으로 얼굴과 몸을 꾸몄지요. 중국은 당唐이, 한국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일본은 헤이안平安부터 에도 막부江戶幕府 초기까지, 월남은 리 왕조 대월利朝大越때 그랬습니다. 상좌부 불교가 융성했던 캄보디아와 타이, 인도네시아 발리 이 지역은 지금도 가 보면 불타는 듯한 문양을 가진 금붙이를 머리 위에 쓰는 장식을 기본으로 하며, 화장이 진하지요. 불교와 힌두교의 본고장인 인도에 가면 여성들이 이목구비에 진한 화장을 하고 각종 진주와 루비를 정수리와 손가락에 끼우고 금으로 된 링으로 코를 뚫어버릴 정도이지요.
- 신분 별로 달랐던 화장법

하지만 고려高麗 때 화장이 마냥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신라新羅 때부터 기녀妓女를 중심으로 당唐의 화려한 화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당唐에서도 극단적으로 화려한 화장 취급을 받는 분대화장紛黛化粧을 기녀妓女들이 중심적으로 했습니다. 분대화장紛黛化粧은 백분白粉을 두텁게 발라 완전 하얗게 칠한 뒤, 눈 주변과 입술을 불타듯이 붉게 칠한 뒤, 향유를 얼굴에 바르고 동백 기름을 머리카락에 발라 번들번들하게 하는 화장법입니다. 요새 중국의 왕훙网红들이 하는 화려한 화장 딱 그겁니다. 이런 분대화장紛黛化粧은 신라新羅에 이어 고려高麗 때도 기녀妓女들이 주로 했기에 기생妓生들이나 하는 화장 취급받았습니다. 사족이지만, 이 분대화장紛黛化粧은 월남의 리 왕조利朝, 일본에서는 헤이안平安부터 에도 막부江戸幕府까지 이어졌습니다. 재미있는 건 월남의 경우 무덥고 습해서 두터운 화장이 잘 안 먹히다보니 귀족 여성들만 살짝하다가 빠르게 포기한 반면 일본은 가부키 화장으로 유명한 히키마유引眉 화장법이 되었지요.

그래서 품위를 지켜야 했던 귀부인들은 일부러 분대화장紛黛化粧과 반대되는 수수한 화장을 선호했습니다. 마침 당대 선진국인 송宋과 군사강국이자 수준높은 문화를 가진 거란契丹이 추구하던 화장도 그런 절제되고 수수한 화장이었습니다. 눈가와 뺨에 붉은 칠을 하지 않고 흰 얼굴에 선명한 검은 눈썹과 입술만 강조하는 화장으로 송宋에서 담장淡妝이라고 불렸지요. 그래서 귀부인은 본인은 기녀妓女와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과하지 않지만 고고하고 아름다운 비담장飛淡妝 화장을 선호했습니다. 월남의 리 왕조利朝부터 레 왕조黎朝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담장淡妝을 모방해 분粉을 옅게 바른 뒤 입술에 붉은 연지만 살짝 찍는 형태로 발전시켰습니다. 무덥고 습한 환경에서는 그게 최선이었지요.
- 고려高麗의 화장품과 화장 도구

고려高麗의 화장 문화가 발달했음은 여러 기록과 유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화장법을 자세히 묘사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 '화장 좀 수수하게 해라'라는 불평이 은근 많이 나옵니다. 이 불평이 나오는 이유가 귀한 쌀과 숯 등 자원을 화장품 만들겠다고 낭비하니 좀 절제하라는 것일 정도이죠. 실제로 고려高麗 사람들은 흰 피부를 미의 기준으로 여겼기에 귀족 여성들은 백미白米와 보리 등 당시에 귀하던 식량을 곱게 갈아 분粉을 만들고는 얼굴에 하얗게 칠했습니다.

얼굴 전체에 분칠을 한 뒤에 홍화紅花(잇꽃)과 주사朱砂(황화수은)을 곱게 갈아 만든 연지를 입술에 발랐습니다. 입술 가운데는 둥글게 칠하고 끝은 가늘고 짧게 칠해 앵두같은 입술을 연출했지요. 우리가 옛날 유럽 사람들이 수은을 화장품으로 썼다는 사실을 종종 미디어로 접하는데 고려高麗도 수은을 화장품에 이용했습니다. 이유는 강한 빛이 오랫동안 유지되기 때문이었죠. 그게 인체에 치명적이다는 사실은 몰랐던 시기였기에 수은을 귀중한 화장품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겉눈썹을 그리고 속눈썹을 검게 칠하기 위해 숯가루를 사용했습니다. 고운 숯가루를 물에 불려 촉촉하면서 점성이 있게 만든 뒤 그걸 붓으로 찍어 그린 것이죠. 혹은 흰머리를 감추기 위한 염색약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보면 알겠지만, 화장품 재료들이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신분은 검소하게 살며 자원을 백정과 나눠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사대부들이 화장을 극혐했지요.

그리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남성과 여성이 세안 후에 피부를 정리하고 보습하기 위해 면약面藥을 발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면약面藥이 뭐로 만들어진 것인지, 더 나아가 그래서 면약面藥이 뭔지 모릅니다. 용도를 보면 현대의 로션과 같은 화장품인 것 같지요. 조선에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화장품으로 미안수美顔水가 있었는데, 술에 계란을 풀어 만들거나 오이나 참외 즙에 꽃잎을 넣어 만들었습니다. 불교佛敎 영향을 받아 식물성 재료를 주로 사용하던 고려高麗라면 아마 오이나 참외를 짠 즙에 꽃잎과 향유 등을 넣어 만든 게 아닐까 싶네요.

화장품이 있다면 당연히 화장품을 보관하는 화장 도구도 있어야 하지요. 고려高麗 때 가루나 액체 형태인 화장품을 보관하는 용기를 화장합化粧盒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쁜 화장품을 담는 용기도 당연히 예뻐야 했기에 화장합化粧盒도 최대한 예쁘고 화려하게 꾸몄지요. 청자靑瓷가 발달한 고려高麗는 화장합化粧盒도 대부분 청자靑瓷로 만들어 수려한 문양을 세겼습니다.

하지만 청자靑瓷로 된 화장합化粧盒은 웬만한 귀족 가문이면 구할 수 있는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상류층 안에서는 또 부와 권력에 따라 나뉘지요. 그래서 황실이나 황제도 두려워하는 권세가 급은 청자靑瓷보다 더 귀한 나전칠기螺鈿漆器로 만든 화장합化粧盒을 사용하며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그것이 나전합螺鈿盒으로 고려에서 생산한 보물 중 가장 귀한 보물 중 하나였지요.

여러 개의 화장합化粧盒과 각종 화장도구, 장신구 같은 모든 도구들을 담는 상자箱子도 있었지요. 상자야 옻칠한 나무나 대나무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지만, 일본에서 회수한 귀중한 고려高麗 대의 상자箱子가 있습니다. 안쪽은 검게 옻칠하고 바깥쪽은 전부 나전螺鈿으로 꾸민 나전국화무늬상자입니다. 권세가라면 이런 상자에 화장합은 물론 귀중한 서책이나 보물을 담았겠지요.

예나 지금이나 화장은 웬만한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거울을 보고 화장합化粧盒을 열어 각종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는 시간은 소중한 시간이었죠. 이 때 화장품을 손가락으로 바르기도 했지만, 귀부인은 붓으로 발랐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메이크업 브러시나 아이브로우연필 같은 화장 전용 도구가 있는 건 아니어서 작은 붓으로 화장했습니다. 제가 아는 국내 매체 중 화장하는 모습을 잘 표현한 매체는 [육룡이 나르샤]에서 길태미가 화장하는 장면이더군요. 길태미는 성격이 여자같아서 화장하는 걸 좋아하는 남자인데, 또 검술은 기가 막히게 잘해 삼한제일검三韓第一劍으로 불리는 최강자입니다. 그의 신성한 화장 시간을 방해하는 자는 3초 안에 머리와 몸통을 깔끔히 분리시키는 무서운 인간이죠. 여튼 길태미가 화장하는 모습이 고려高麗 당시 화장하는 과정을 가장 자세히 묘사한 것일 겁니다. 의외로 여성향 드라마인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나 [빛나거나 미치거나]에는 잘 안나오더라고요.

[육룡이 나르샤]에도 상세히 묘사되지만, 화장할 때 꼭 있어야 하는 건 거울이죠. 본인 얼굴을 보며 화장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니 말입니다. 아직 유리를 크게 만들어 쓰지 않았던 고려高麗 때는 청동거울로 본인 얼굴을 비쳐보며 화장했습니다. 지금 박물관에 있는 청동거울은 전부 푸르딩딩하게 녹이 슬어있어 반사가 전혀 안되지만, 그건 오래되서 녹이 슨 것이고 사용할 때는 수시로 동백 기름을 발라 매끈하게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왜곡은 있다만 얼굴이 잘 비쳤죠.

또한 얼굴 화장을 하는 김에, 아니면 평소에 머리를 빗어 정갈히 했습니다. 이 때 빗이 꼭 필요하죠. 옥이나 나무, 권세가라면 금박이 붙은 황동 등으로 만든 빗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빗은 단순히 머리를 빗는 물건 뿐만 아니라 아예 머리에 꽃아 화려한 빗장식을 머리 장식으로 활용하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미용하는 도구로 가위를 사용했습니다. 고려高麗 때 길게 자란 손톱과 발톱을 가위로 자르고 여성의 경우 겉눈썹이나 머리카락 중 삐쭉 튀어나온 부분은 가위로 잘라 정갈하게 정돈했지요. 고려高麗 때 발굴된 가위를 보면 8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唐이 적극적으로 이용한 가위 모습으로 스프링 원리를 이용해 잘라낸 가위이지요.
- 목욕과 위생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강조하는 문구인데, 고려高麗 사람들은 위생을 중시해서 매일 목욕하고 몸에 향기가 나게 하는 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한 건 한국은 화강암이 지하수를 필터링해줘 부드럽고 깨끗한 물이 흔하기 때문이죠. 중국이나 중동, 유럽 등 대부분의 지역은 탁한 석회수여서 목욕할수록 피부가 상하는데, 한반도는 그런 면에서는 축복받았습니다. 여튼 기록에 따르면 고려高麗 사람들은 얇은 백저의白紵衣를 입고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즉, 목욕 전후에 백저의白紵衣를 입은 것이죠. 마치 지금 일본에서 온센溫泉에 갈 때 유카타浴衣를 입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백정은 냇가에서, 귀족과 황실은 집 안이나 사찰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겼습니다. 목욕탕은 추후 주住 편에서 자세히 다룰 건데, 세신洗身을 중시 여긴 불교佛敎의 가르침을 받아 크게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상류층은 전용 목욕탕에 물을 따뜻하게 데운 뒤, 향유와 꽃을 넣어 향기를 더한 물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불교佛敎에서는 몸을 씻어 불쾌한 찌꺼기와 냄새를 없애고 향기를 더하는 것도 공덕功德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때 팥이나 녹두를 가루낸 뒤 동그랗게 경단으로 빚은 걸 물에 풀어 거품을 내고 씻었는데, 지금의 액체비누나 바디워시에 해당하는 물건이었죠. 이걸 조두澡豆라고 불렀습니다. 팥이나 녹두 등 곡물에 들어있는 사포닌 성분이 물과 만나 거품을 내면서 계면활성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계면활성제가 물과 기름을 분리하며 신체에서 나오는 각종 기름과 피지를 씻어냈지요.

그리고 머릿기름은 불을 때고 남은 재를 물에 푼 잿물이나, 쌀을 불린 쌀뜨물로 씻어냈습니다. 보통 잿물은 강한 알칼리성이어서 성능은 좋지만 피부에 좋지 않고 무엇보다도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물이어서 백정들이 주로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귀족 이상은 넘치는 쌀로 만든 쌀뜨물을 많이 쓰며 머리를 감아 머리카락과 피부를 보호했지요.

알칼리성 물로 머리를 감기만 하면 머리가 상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보습하고 산성을 되살리기 위한 트리트먼트로 창포물을 이용했습니다. 강가에 널린 창포를 잘라 물에 담근 뒤 사용했기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지요. 지금은 많이 사라진 문화이긴 하지만 단오端午가 되면 창포물로 머리를 감는 행사를 하기도 했지요. 여튼 이렇게 머리카락에 영양을 보충한 뒤에는 머리를 빗고는 동백기름이나 향유香油를 발라 머리를 단정하게 고정했습니다.
- 옷을 빨 때 사용하던 세제

몸 뿐만 아니라 입던 옷도 깨끗하게 빨아야죠. 고려高麗 때 묵은 때를 씻기 위해 쓰던 세제로는 잿물과 쌀뜨물, 조두澡豆를 사용했으며, 귀족이나 승려는 조두澡豆보다 거품이 더 많이 나오는 무환자나무의 열매 가루를 애용했습니다. 열매 겉껍질을 벗겨 물에 비비면 거품이 많이 나와 이 거품으로 옷을 빨고, 검은 씨앗은 사찰에 반납해 염주念珠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혹은 조각자 열매의 껍질을 벗겨 세제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高麗 사람들은 백저포白紵布 같은 흰 옷을 기본적으로 입었기에 흰색을 유지하는 표백제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표백제로는 산성을 띄는 물을 구해 사용했는데, 주로 오미자를 넣고 끓인 오미자 물이나 각종 식초에 담가 찌든 때와 묵은 색을 뺐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녹두를 삶은 물에 담가 삶아서 옷을 흰색으로 되돌렸습니다.

빨래하는 방법은 뭐 조선朝鮮과 동일해서 간략히 정리하겠습니다. 솥에 물을 끓이고 각종 세제와 표백제를 넣어 옷을 삶은 뒤 빨래판 위에 옷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사정없이 패면서 때를 벗겨냈지요. 그리고 새로운 물에 씻어낸 뒤 다듬이판 위에 올려놓고 홍두깨로 치면서 옷을 다듬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숯불로 벌겋게 데운 인두나 작은 무쇠판에 숯불을 올려놓아 뜨겁게 달군 다리미로 옷을 다림질했습니다. 이건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어서 이 정도만 언급해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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