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족 여성들의 화려한 머리 꾸미기

지난 기본 편에서도 봤듯이 고려高麗 여성은 다양한 머리 모양을 하고 다녔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머리카락이 기본적으로 더 길고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구사하지요. 때문에 고려高麗 때 여성들의 머리 모양은 다채로웠습니다. 문제는 그 머리 모양이 지금 전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문자 기록으로는 도대체 어떤 머리 모양인지 형태를 제대로 알기 어렵고, 그나마 있는 불화에서 찾아보며 검증해야 합니다.

기록으로 있는 머리 모양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언급되는 묶은 머리인 편발수계偏發垂髻, 가발을 돌돌 말아 뒤로 얹은 굴계屈髻, 가발을 위로 계속 올려 탑을 쌓은 고계高髻, 위로 땋은 머리를 말의 꼬리처럼 옆으로 늘인 추마계墜馬髻 등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정확한 모양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불화나 민속화 등을 보면 기본적인 고려高麗 여인들의 머리 모양은 상투처럼 정수리 위에 머리 묶음을 얹어놓은 형태였습니다.

고려高麗나 송宋, 일본日本 등 당대 국가들에서 여성들의 머리를 고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는 끈이었습니다. 비단으로 된 얇고 긴 끈으로 머리 다발을 묶어 고정했지요. 이 띠 자체를 장신구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귀족들은 그 이상의 값비싼 장신구를 추가했습니다. 가장 띠 다음으로 기본적인 머리 고정 도구이자 장신구는 비녀이죠. 여인들은 동이나 은, 금으로 용이나 봉황 등을 세긴 비녀를 머리에 꽂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고정한 다음, 머리에 머리꽂이나 각종 장식을 달아 더욱 화려하게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불교佛敎와 도교道敎가 융성한 고려는 연꽃이나 나무, 봉황, 새, 나비 등 자연물을 모방한 장신구들이 가장 화려하게 발달했습니다. 유학儒學으로 검소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아니고 오히려 화려한 미를 강조한 불교佛敎 사회였기에 여성 장신구의 전성기였죠. 금으로 띠를 만들어 머리 위에 얹거나 진주나 호박, 옥 등 각종 보석을 추가했습니다.
![고려 머리 장식을 잘 표현한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https://blog.kakaocdn.net/dna/H1WPk/dJMcadh9MX6/AAAAAAAAAAAAAAAAAAAAAHSkB0qKT1SE10Qa4mIw0doBRkg0NORE-sXQm0ZmoYbD/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855099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P%2FOtIpWytQpUqvFEWpbEvAtAxbU%3D)
또한 남성 편에서 나왔듯이 고려高麗 때는 남녀 가리지 않고 귀고리와 귀걸이를 하고 다녔습니다. 여성은 특히나 더 화려하고 다채로운 귀 장식이 많았지요. 이런 화려한 모습은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건 고증이 훌륭한 편까지는 아니지만 머리 장식만큼은 실제 유물을 바탕으로 고증을 최대한 살려 구현한 것이거든요. 때문에 고려高麗 당시의 장신구 모습을 직관적으로 보기 가장 좋은 미디어에요. 아마 지금까지 나온 매체 중에 고려高麗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일 겁니다.
- 손과 목을 장식한 장신구

머리 뿐만 아니라 손과 손목, 목 일대에도 당연히 다양한 장신구를 사용했습니다. 반지와 팔찌는 기본이었고 현대의 브로치처럼 비단 옷에 다는 금속 장신구들도 많았습니다. 고려高麗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을 보유해 금과 은, 동, 구리 등 다양한 금속공예를 후원하고 작품들을 얻을 수 있었기에 화려한 장신구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다만 목걸이는 주술적 의미가 강해 고려高麗 때는 상대적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 넉넉한 옷으로 꾸민 고려高麗 여인

조선 후기 여성의 옷차림을 보면 특히 상의가 소매가 짧습니다. 근데 조선 후기에서 역으로 조선 전기, 고려 후기, 고려 중기, 고려 전기로 갈수록 여성의 옷 길이와 폭이 넓어집니다. 이유는 고려 전기로 갈수록 여성의 신체 노출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이 과감하게 자신의 몸매를 드러냈고요. 우리의 상식과 반대이죠. 고려 전기와 중기 때는 지금 몇몇 기독교나 이슬람 근본주의 사회처럼 높은 신분의 여성이 손이나 얼굴조차 드러내는 걸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귀족 여성들의 옷은 기본적으로 커서 손이나 발이 안 보였습니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입는 백저포白紵布부터가 되게 커서 손을 다 가릴 정도였습니다. 그 큰 옷 위에 또 한자로는 유襦라고 불리는 저고리를 입었지요. 이 저고리는 지금으로 치면 코트에 해당하는 옷으로 고려 중기와 후기로 넘어가면 유襦 중에서도 무릎까지 내려가는 장유長襦를 입기도 했습니다. 이걸로도 만족하지 못해 손에 강랑江浪이라는 넉넉한 흰 천을 추가해 손톱조차 보이지 않게 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치마는 노란 치마인 황상黃裳을 즐겨 입었다고 합니다. 이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오는 내용이고, 실제로는 더 다채로운 색상과 모양의 치마를 입었겠지요. 여하튼 귀족 여인들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겉치마를 입고 실내나 밖에 돌아다녔습니다. 편의성은 포기한 것이죠. 근데 나중에도 다룹니다만, 고려高麗 시기 때 송宋도 그렇고 옷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넉넉하게 입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 햇빛으로부터 얼굴을 가린 몽수蒙首

조선朝鮮 여인들이 쓰개 치마를 쓰고 다녔다면, 고려高麗의 높은 여인들은 외출할 때 몽수蒙首를 쓰고 다녔습니다. 검은 삿갓이나 립立 모자 위에 얇고 검으며 온 몸을 덮을 정도로 큰 비단을 씌운 쓰개로,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이 귀족 여성의 얼굴을 보기 힘들게 가리는 용도였습니다. 요새 몽수蒙首는 중국의 무협지나 한국 영화 중 조선 전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종종 나와서 이름은 몰라도 생김새는 잘 알지 않을까 싶네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몽수蒙首는 신분이 어떻든 간에 누구나 구매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가격이 사악하다는 것이죠. 집 몇 채의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귀족 여성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죠. 이 몽수蒙首는 고려高麗의 뒤를 이은 조선朝鮮에 너울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됩니다. 기존보다 살짝 짧아질 뿐 비싸 높은 신분의 전유물이었던 것은 동일했죠.

몽수蒙首라는 물건은 중국 당唐에서 시작한 귀족 여성 전용 머리가리개였습니다. 본디 타클라마칸 사막에 살던 선비족 여성이 모래 폭풍으로부터 눈과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챙이 넓은 모자에 비단이나 명주 천을 두른 멱리羃䍦를 사용했습니다. 지금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베두인 여성이 햇빛과 모래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전신을 가린 부르카برقع를 쓰듯이 말이죠. 이 멱리羃䍦가 당대唐代에 귀족 여성들이 높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쓴 고급 장신품이 되었지요. 멱리羃䍦는 검은색이나 흰색을 사용했고, 초기에는 발까지 내려간 긴 천을 사용했으나 후대에 들어서 어깨까지만 가리는 유모帷帽로 발전했습니다.

이 멱리羃䍦가 각 나라로 전해지며 각자만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고려高麗에는 몽수蒙首로 불리며 발끝까지 내려가는 검은 천 형태를 유지했지요. 당시 월남의 대월大越에서는 논 뜨엉笠上(현대 베트남 문자: Nón thượng)으로 발전했습니다. 중국의 유모帷帽를 쩐 왕조 대월陳朝大越이 받아들여 덥고 습한 대월大越 기후에 맞춰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비단은 걷어내 끈으로 간소화시킨 뒤 챙을 아래로 내려 강한 햇빛을 막았지요. 굵은 대나무를 엮어 통풍성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월남과 비슷하게 덥고 습한 일본 역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때 받아들인 멱리羃䍦를 현지화했습니다. 대나무나 갈대 등으로 만든 챙이 넓은 모자 이치메가사市女笠에 성글게 짠 반투명 천을 내린 무시노타레기누虫の垂衣를 사용했지요. 이건 월남의 논 뜨엉笠上보다 좀 더 멱리羃䍦 원조 모습에 가깝습니다. 무시노타레기누虫の垂衣 역시 귀족 여성이 참배를 하거나 바깥 나들이를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멱리羃䍦가 여러 나라에 적용된 사례는 당풍唐風이 여러 한자문화권 나라에 미친 영향 중 하나의 사례이죠.
- 옷을 더욱 화려하게 빛낸 장식

선녀복이나 중국 당唐, 송宋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여성들이 입는 옷 중에 팔과 어깨, 등에 걸치는 긴 천이 있습니다. 딱히 쓸모는 없고 그저 패션으로 걸치는 긴 비단인데 이걸 표裱라고 합니다. 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비단으로 만든 옷으로 예쁜 자수를 추가해 화려한 옷에 하나 더 추가해 전체적으로 하늘하늘하고 우아한 모습을 연출했지요.

산뜻하게 부는 바람따라 하늘하늘 날리는 표裱는 마치 하늘의 선녀와 같은 인상을 주었기에 귀족 여성들은 표裱를 즐겨 입었습니다. 통일신라 때 당唐에서 수입해 몽골 침입 후에도 여성들이 놓치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당唐으로부터 표裱를 받았다면, 송宋으로부터는 표裱보다 더 두꺼워 불투명하고 무거워 어깨에 걸치는 영건領巾을 수입했습니다. 그래서 고려 중기와 후기에는 영건領巾을 더 애용했지요.

표裱와 영건領巾은 송宋과 고려高麗 뿐만 아니라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도 존재했습니다. 한국이 고려高麗일 때 월남은 리 왕조 대월利朝大越으로 여기도 한창 불교가 융성한 나라였으며, 일본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였지요. 이 시기에 리 왕 利朝에서는 여성들이 얇은 비단으로 만든 표裱를 걸치고 다녔고, 일본은 히레比礼라고 부르며 걸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후에 모裳라는 일본 독자적인 패션으로 발전했죠.

또한 긴 비단으로 허리를 두른 뒤 남은 부분은 매듭을 짓고는 뒤통수나 옆통수에 길게 내렸는데, 그걸 결대結帶라고 부릅니다. 고려高麗 때 유행이던 장식으로 비단이 이만큼 남는다는 걸 과시함과 동시에 우아한 멋까지 챙긴 패션이죠. 그리고 이 허리띠에 각종 향낭香囊을 차 주변을 향기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발로는 나무 밑창에 두꺼운 비단을 덮어 만든 채혜彩鞋를 즐겨 신었습니다. 당혜唐鞋, 운혜雲鞋 등 여러 가죽신이 있었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채혜彩鞋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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