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宋과 유사하던 고려高麗 의복

[의식주衣食住 : 의복과 장신구]에서 기본 전제는 고려高麗 전기 의복, 즉 몽골 침입 전 의복을 가리킵니다. 이 전제를 깔고 한번 살펴보지요. 고려高麗 의복은 유물로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전부 다 화장 때 불태우거나 여러 사건으로 소멸했지요. 때문에 고려高麗 의복의 정확한 생김새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권력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평민의 의복이면 더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송宋의 사신 서긍이 남긴 소중한 기록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 있습니다. 다행히 그 책에 고려高麗 의복을 상세히 기록해줬더군요. 그 기록을 중심으로 다른 것과 교차검증하며 고려高麗 의복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백정의 의복이 송의 의복과 비슷하다'라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른 것과 교차 검증하면 실제로 고려高麗 평민과 송宋 평민의 옷이 비슷비슷하면서도 자세히 들어가면 조금씩 다릅니다. 마치 지금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 유럽이 나이키 옷을 입는 등 비슷한 옷을 입지만, 나라 별 문화와 유행에 따라 옷차림이 조금씩 다르듯이 말이죠. 그럼 한번 고려高麗의 의복을 볼까요?
- 두건頭巾을 중요하게 여긴 고려高麗

고려高麗시대 때 남성들은 머리카락 윗부분, 즉 상투를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정수리 머리카락을 잘라 정갈하게 상투를 묶어 올리던 조선朝鮮과 달리 전 시대에는 그냥 머리카락 그대로 묶어 올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대의 정수리 위에 올리는 똥머리와 똑같았죠. 때문에 상투가 커 무슨 이마처럼 생겼고 사람에 따라 머리카락이 삐쭉삐쭉 튀어나와 보기 좋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고려高麗 남성들은 상투를 두건으로 가리는 걸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범죄자는 두건頭巾을 빼앗아 상투를 드러내게 했기에, 상투가 드러난 사람은 범죄자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문라건文羅巾을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백정 등 평민은 끈이 4개짜리 문라건文羅巾을 착용했고, 귀족들은 끈이 2개짜리 문라건文羅巾을 착용해 신분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재질 역시 다양했는데, 백정들은 형편이 좋으면 명주실로 만든 문라건文羅巾을 쓰고 보통은 마포나 생포 등 삼베로 만든 문라건文羅巾을 쓰고 다녔습니다.

문제는 검게 칠한 문라건文羅巾은 가장 저렴한 것도 가격이 좀 나가는 두건이었기에 가난한 백정들은 문라건文羅巾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대나무를 엮어서 죽관竹冠을 썼다고 합니다. 이 죽관竹冠이 뭐냐가 문제인데, 삿갓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겁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모양이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며 규격이 없다는 묘사를 하고, 대나무나 갈대를 일렬로 엮어 대충 만들기 쉬운 모자이기 때문이죠. 여튼 고려 성인 남성은 어떻게든 모자나 두건을 만들어 정수리를 가렸습니다.

이렇게 상투를 드러내지 않는 풍습은 사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적인 문화였습니다. 이것도 당唐에서 시작한 문화인데, 당대唐代부터 상투를 검은 모자로 가리는 것을 매너로 생각했기에 성인 남성은 소각복두軟脚幞頭나 그것이 없다면 대충 검은 두건으로 정수리를 감쌌습니다. 그것이 송宋에 들어서면 민자건民子巾 등 다양한 검은 두건으로 발전해 서민부터 사대부까지 널리 쓰고 다녔습니다.

덥고 습한 월남에서도 두건을 썼습니다. 당唐의 소각복두軟脚幞頭를 통풍이 잘되는 거친 옷감으로 작게 만들어 착모했지요. 주로 무사와 귀족이 소각복두軟脚幞頭를 착모했는데 아무래도 더운 기후인 만큼 머리카락을 짧게 깎아 상투를 작게 만들고 그 위에 복두幞頭를 썼습니다. 평민들은 그냥 머리를 짧게 깎은 맨머리로 돌아다녔고요. 이마저 리 왕조利朝와 쩐 왕조陳朝 이후로 넘어가면 결국 더위에 항복해서 정수리 전체를 덮는 복두幞頭에서 조선의 망건網巾처럼 비단으로 이마만 두르는 두건으로 변합니다.

월남보다는 그래도 좀 서늘한 일본은 에보시烏帽子라는 모자로 발전했습니다. 일본의 에보시烏帽子는 높이 솟아올라 머리의 열을 최대한 위로 보내 시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사들이 전쟁터에 나가거나 농민들이 밭일을 할 때 등에는 흰 두건을 에보시烏帽子 바깥 이마에 둘러 고정시켰지요. 이 에보시烏帽子는 후에 갑옷을 정리하는 파트에서 많이 나올 겁니다. 그 때 자세히 정리할게요.
- 성인 여성의 머리

여성은 남성과 달리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구사하기 때문에 뭐가 표준이다라고 말하기 어렵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붉은 끈을 이용해 다양한 머리 모양을 만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성 머리는 고려도경高麗圖經 등 기록과 불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여성도 신분에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은 뒤 앞으로 늘어뜨린다고 합니다. 헤어스타일은 특성 상 귀족 등 고위계급이 더 화려하게 하기 때문에 추후 귀족들의 옷차림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 늘어뜨린 머리에 띠를 두른 어린이

혼례를 마친 성인 남성은 상투를 튼 뒤, 그 상투를 가리기 위해 두건이나 모자를 착용했습니다. 그럼 어린이는 어떻게 했을까요? 송사宋史나 고려도경高麗圖經 등 기록에는 어린 남자는 머리를 뒤로 내린 뒤 검은 비단을 묶고, 어린 여자는 머리를 내리고는 빨간 비단을 둘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뭔가 댕기머리 같죠? 머리를 땋아 아래로 내린 땋은머리 끝에 댕기를 단 느낌입니다. 조선시대 때 어린 아이들은 다 댕기를 달았고요. 그럼 고려高麗도 똑같지 않았을까요?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왜냐면 머리를 뒤로 내리는 헤어스타일은 삼국시대 때부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어린이들의 기본 머리 형태였지만, 댕기 자체는 몽골 지배기 이후에 등장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머리를 묶어 내렸다고 했지, 땋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때문에 몽골 지배기 전 어린이들의 머리는 천으로 묶은 뒤 나머지를 늘어뜨린 묶음 머리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단순한 포니테일이었던 것이죠.
- 백저포白紵布를 즐겨 입은 고려 사람

조선시대 때 사람들이 흰 옷을 즐겨입는다 해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불렸는데, 고려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남녀와 신분에 상관없이 다들 흰 백저포白紵布를 기본으로 입는다고 합니다. 기본 옷차림은 염색된 옷을 꺼리고 흰 상하의나 정 색상이 있는 것이라면 노란 하의를 즐겨 입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여성의 경우 형편이 된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비싼 몽수蒙首라는 머리 덮개를 쓰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몽수蒙首는 이후 귀족의 옷차림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고려 사람들이 즐겨 입었던 백저포白紵布는 기장이 매우 긴 웃도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조선시대에 두루마기라고 불리던 그 옷이죠. 백저포는 외출복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입는 등 항상 입는 상의였습니다. 그 백저포白紵布에 바지나 치마를 입은 뒤, 가죽 또는 천으로 만든 허리띠를 둘러 상하의를 고정시켰지요.

하지만 같은 백저포白紵布라 해도 옷감 재질에 따라 생김새와 착용감이 천차만별이겠죠. 귀족은 고운 비단이나 부드러운 모시로 만든 백저포白紵布를 입고 백정 이하는 거친 삼베로 만든 백저포白紵布를 입었습니다. 백정 중에 가난한 농민이나 아니면 노비들은 정제가 덜 되어 갈색에 가깝고 꺼끌꺼끌하니 거친 삼베로 만든 옷을 입었겠지요.
- 겨울에 입은 방한복

한반도는 겨울이 춥고 혹독했습니다. 숲이 우거진 고려高麗 때는 더 했지요. 허나 이런 추위를 삼베로 짠 옷으로 막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백정들은 방한복을 구비해 입고 다녔습니다. 문제는 당시 목화木花가 없었기에 따뜻한 옷감 자체가 없었지요. 떄문에 가장 흔한 옷은 삼베 옷 틈에 갈대 꽃, 버들강아지 풀, 깃털, 지푸라기 등 우겨넣을 수 있는 건 다 우겨넣어 대충 만든 누비옷이었습니다. 이마저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한지를 어떻게든 얻어 오리고 조립해 지의紙衣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 다양한 바지와 치마

상의로 백저포白紵布를 입었다면 하의는 다양한 바지와 치마를 착용했습니다. 여름이 심히 무더운 한반도 기후 상 여름에는 시원하게 입기 위해 반바지가 등장했습니다. 그것을 한국말로는 잠방이, 한자로는 중국에서 부르는 표현인 독비곤犢鼻褌을 그대로 가져와 불렀습니다. 근데 잠방이와 독비곤犢鼻褌은 엄밀히 보면 다르거든요. 잠방이는 지금 현대에 입는 반바지랑 똑같은데 중국에서 부르는 독비곤犢鼻褌은 옆이 트여있는 반바지입니다. 고려 불화를 보면 애매하긴 한데, 아마 잠방이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여튼 잠방이는 물에 들어가 일하는 농민들이 주로 입는 바지였습니다.

반면 봄가을과 겨울 등 추운 날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는 긴 바지는 대부분 옆이 트인 넉넉한 바지였습니다. 남자는 흰 바지나 노란 옆트임 바지를 주로 입었고, 여성 바지는 종류가 더 다양했습니다. 허리춤에서 어깨로 올라가는 걸이가 추가로 있어 어깨에 고정하는 문릉관고, 얇은 천인 라羅로 짜 옆을 틔워놓은 옆트임바지, 바지부터 버선까지가 한 세트인 말두고 등의 바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지만 입거나 그 위에 치마를 둘렀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신분과 상관없이 여성들은 겨드랑이 바로 아래까지 오는 주름진 노란 치마를 즐겨입었다고 하는데, 겨드랑이까지 올라가는 치마는 보통 당대唐代에 유행했던 여성 복식이거든요. 고요 당풍唐風 복식이 통일신라와 고려전기에 유지되었습니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당唐과 송宋은 웃도리를 치마 안에 밀어넣어 치마가 밖으로 드러났지만, 고려高麗는 치마 위에 웃도리를 걸쳐 치마를 가렸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아래로 내려간 기장 부분을 좀 올린 뒤 허리띠를 메어 폼을 넉넉하게 하기도 했지요. 고려高麗 땅이 추운 땅이어서 그런지 몸매를 드러내기보다는 좀 더 따뜻하게 입은 느낌입니다.
- 행등行縢과 신발

바지를 입을 때 경우에 따라 바지 위에 천을 덧대어 바지 안으로 흙먼지나 벌래가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행전行纏이라는 부속품을 이용했습니다. 행전行纏은 발토시처럼 생긴 천으로, 바지와 버선을 신은 상태로 행전行纏을 위에 걸치고는 위 아래에 대님을 단단히 동여 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시대 때는 지금의 각반처럼 긴 천을 붕대처럼 정강이에 빙빙 두른 행등行縢을 입어 넉넉하던 바지 밑단을 급히 좁혔습니다. 주로 밭에서 거친 일을 하는 농민이나 상인, 또는 말을 타는 군인들이 즐겨 입었습니다. 흙먼지와 벌래를 막고 말 피부에 쓸리는 등의 일을 막는 용도로 딱 정해져 있지요. 그러다보니 백정 남성은 많이 입지만 여성이나 귀족은 잘 안 입는 옷 부속품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양말에 해당하는 버선은 뭐 조선시대 모습하고 똑같아서 언급할 게 딱히 없네요. 신라시대 때 도입되어서 형태 변화 없이 조선시대, 더 나아가 한국전쟁 때까지 유지되던 의복입니다.

다음은 신발입니다. 신발도 종류가 나무로 밑창을 만들고 그 위를 가죽을 둘러싼 목화木靴나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짚신을 신었습니다. 평범한 백정들은 당연히 짚신을 신었지요. 그리고 비가 오는 여름이면 나무를 깎아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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