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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공학/저멀리 우주로

[저멀리 우주로: 우주경쟁] 소련 해체로 끝난 경쟁

by 롱카이 202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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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영원히

https://www.youtube.com/watch?v=ZyvUtY85JU8 

프리스타일 - 안녕 영원히Прощай Навеки

 
 
 

  • 무너진 소련 경제

소련의 고기 배급
소련의 고기 배급

소련은 공산주의 체제 하에 국가 계획경제로 운영했지만 국가예산은 외부와의 무역으로 수익을 벌었습니다. 소련은 NATO 회원국에게 바쿠 석유를 판매하며 높은 이익을 얻었고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 예산 보유액은 높았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본격적인 우주개발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소모하며 소련 국가보유액은 감소했고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증산해 석유가격이 하락하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단으로 군사력을 택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중화학공업과 군수품 생산을 우선시했기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필품 생산은 자꾸만 뒷순위로 밀렸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공산주의국가 인민들은 필요한 물품들을 필요할 때 보급받지 못했습니다.

소련-아프간 전쟁
소련-아프간 전쟁

거기에 1968년 바르샤바조약기구OBД에서 일어난 민주화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해 바르샤바조약기구OBД가 소련을 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1979년 발발한 소련-아프간 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반소진영으로 무자헤딘을 지원하자 소련은 소련-아프간 전쟁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소련은 1980년대 경기침체에 빠졌고 반대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회복하고 막대한 자본을 마음껏 투자하며 미국과 자유주의 진영의 경제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체르노빌 원전사고

그 와중에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는 대형사고가 터졌고 소련 정부는 이를 비공개했지만 결국 세상에 알려졌고 소련 정부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뒤늦게 사고를 수습했습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 하나에 소련 국가예산의 10% 이상이 투입되며 소련경제는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 동유럽혁명으로 해체된 바르샤바조약기구OBД

무너진 베를린 장벽
무너진 베를린 장벽

결국 커다란 손실을 감당하지 못한 소련은 1989년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시네트라 독트린을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헝가리 인민공화국은 바로 헝가리 공화국으로 체제가 바뀌었고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무너지고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몽골에서 인민공화국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체제로 변했습니다. 소련은 소련 우방국을 1989년부터 199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모두 상실했습니다.
 
 
 

  • 8월 쿠데타와 소련 해체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줄줄이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소련은 소련만큼은 보존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소련도 당장 국가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만성적인 경제침체를 어떻게 해결하지 못하면 1960년대부터 이어진 만성적인 경제침체로 무너진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과 같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젊은 서기장이 그런 소련 정부를 다독이고 새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그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었습니다.

혼란에 빠진 소련
혼란에 빠진 소련

그는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을 사회민주주의체제로 변경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들어서자 시장물가는 가격이 폭등하면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발언권을 제시하자 건전한 대화보다는 억눌린 분노가 표출되었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 등지의 소수민족이 핍박으로 받은 설움을 토로하며 감정이 격해졌고 독립운동이 발발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결국 무력으로 진압해야 했습니다.

주권국가연맹 계획
주권국가연맹 계획

이런 난장판 속에서 우주개발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1990년 소요사태를 겨우 진압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스스로를 대통령이라 부르며 소련을 전면적으로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때문에 소련 정부 내에서도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991년 3월 17일 소련 존속 전연방 국민투표를 열었고 투표결과 소련 존속 찬성표가 77%가 되면서 소련 존속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권국가연맹을 고려했습니다.

소련 해체
소련 해체

허나 주권국가연맹 논의 하루 전인 1991년 8월 19일 8월 쿠데타가 일어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소련 유지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소련 인민들은 다시 강압적인 소련 부활을 원하지 않아 쿠데타 세력에 저항했고 보리스 옐친이 대통령에 임명되었습니다. 보리스 옐친은 9월 발트3국의 독립을 허용하고 1991년 12월 21일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독립국가연합 신설에 서명하며 소련은 해체되었습니다.
 
 
 

  • 러시아 경제 파산과 멀어진 우주개발의 꿈

러시아로 넘어간 핵무기
러시아로 넘어간 핵무기

1991년 12월 21일 소련이 해체되고 여러 나라들로 분열되자 큰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소련의 우주개발을 담당하던 기관은 우크라이나에 있었는데 중앙통제는 모스크바와 러시아였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우주개발기구와 핵폭탄 시설 이전을 두고 갈등을 벌였습니다. 이에 미국과 NATO가 우크라이나를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러시아에 핵폭탄과 우주개발기구를 이전할 것을 제안했고 나라가 파탄나 그런 중대한 기구들을 관리할 여력이 되지 않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핵폭탄과 우주개발기구를 넘기며 일단락 났습니다.

옐친 시대 때 러시아는 우주개발은 꿈도 못꾸던 시기였다
옐친 시대 때 러시아는 미국의 도움이 있어야 우주개발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 경제도 파탄났습니다. 1991년 가이다르 경제개혁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1998년 러시아는 모라토리움을 선포할 정도로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당장 돈이 없는 상황에서 우주개발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우주기술을 탐낸 NASA가 러시아의 우주개발을 지원하겠다고 손을 내밀었고 러시아는 그 손을 잡아야만 우주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소련과 미국의 우주경쟁에서 미국이 완승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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