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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종교 사회宗敎司會

[종교 사회宗敎司會 : 유학과 교육] 과거와 관료

by 롱카이 2026.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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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科擧 응시를 위한 예비 시험

고려 국자감 문
고려 국자감 문

고려高麗 때 문무관 자제들과 관리에 뜻이 있는 백정들이 국자감國子監이나 사학私學에서 수학한 이유는 해당 학교를 졸업하며 치루는 예비 시험을 통과해야 과거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자감國子監에서는 국자감시國子監試라는 시험을, 사학私學에서는 사마시司馬試를 응시해 통과해야 했지요. 국자감시國子監試와 사마시司馬試는 시기에 따라 응시 종목이 달라졌는데, 보통은 한시漢詩를 짓는 진사과進士科와 경전 문구를 이어 작성하고 뜻풀이를 적는 명경과明經科를 봤습니다.

진사과는 운을 따라 아름다운 한시를 즉석에서 지어내는 시험이었다
진사과는 운을 따라 아름다운 한시를 즉석에서 지어내는 시험이었다

당시에는 외교 문서와 국내 서류를 수려한 한문漢文으로 작성했기에 한문漢文 중 최고 난이도에 속하는 한시漢詩를 얼마나 잘 쓰느냐가 관리의 핵심 역량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사과進士科는 글의 주제와 운이 주어지면 조건에 맞춰 아름다운 산문시를 짓는 부賦, 6개의 운을 사용하는 육운시六韻詩나 10개의 운을 사용하는 십운시十韻詩를 짓는 시詩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제와 운을 받아서 즉석으로 지어내야 했기에 난이도가 매우 높았고, 중요도 역시 가장 높은 시험이었지요. 명경과明經科는 간단했습니다. 배운 수많은 경전 중 임의로 하나의 경전 문구를 골라 빈 칸을 두고 그 칸을 채운 뒤 전체 문장의 뜻풀이를 적는 것이었습니다. 많이 단순한 편이어서 명경과明經科는 쉬운 문제로 취급받았고, 응시생들은 진사과進士科에서 승부를 냈습니다.
 
 
 

  • 엘리트로 대우받은 진사進士

云容容의 일러스트를 레퍼런스로 AI로 창작한 진사 합격복
云容容의 일러스트를 레퍼런스로 AI로 창작한 진사 합격복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면 진사進士라는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진사進士는 공무원이 아니었지만 국가에서 인정하는 최고급 엘리트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기에 진사進士가 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 진사進士라는 직위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명예직이었으며, 국가는 진사進士에게 군역 면제와 국자감國子監 평생 장학금 지원이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진사進士는 국자감國子監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수학할 수 있었고 본인 마을에서 명망 높은 유학자로 대우받아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향선생鄕先生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인생이 잘 풀린 편이지요. 그래서 진사進士가 된 사람은 진사進士 합격증서인 백패白牌를 손에 쥐고 어사화御賜花가 달린 복두幞頭를 쓰며,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가죽신인 화화革履를 신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가 합격 소식을 알리고 가족의 환영을 받으며 3일 간 휴가를 갔다고 합니다. 이 때 어사화御賜花가 워낙 길어 복두幞頭에 꽂고 가면 꺾이니 끝을 실로 묶어 입으로 물거나 손으로 잡고 갔다고 하네요.
 
 
 

  • 본격적인 과거科擧 응시와 급제자

공민왕 시기의 이제헌이 출제한 과거 문제
공민왕 시기의 이제헌이 출제한 과거 문제

진사進仕가 되면 언제든지 과거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과거科擧는 3년마다 한번씩 치루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뜻에 따라 1년에 한번씩이나 2년에 한번씩 비주기적으로 과거科擧가 시행되었습니다. 과거科擧 응시생은 예비 시험과 동일한 제술업製述業과 명경업明經業 분야 중 하나를 선택해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응시 방법도 동일했습니다. 제술업製述業은 주어진 주제와 운을 바탕으로 멋들어진 한시漢詩를 즉석에서 지어내는 것이었고, 명경 明經業은 경전 문구를 제대로 암기했는지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과거의 총책임자는 지공거知貢擧라는 시관詩官으로 당대의 가장 명망이 높은 유학자가 직접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했습니다. 당연히 최고 시험인 만큼 난이도도 매우 높아 합격자 수가 극단적으로 낮기로 악명 높았습니다.

과거 합격자가 입은 옷을 그린 云容容 작가
과거 급제자가 입은 옷을 그린 云容容 작가, 명나라 복식이지만 송과 고려 당시 복식과 유사하다

조선朝鮮 때는 과거科擧 응시 시 출제자와 응시생을 철저하게 익명으로 가려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했는데, 그 이유는 고려高麗 때 출제자와 응시생을 실명으로 밝혔기에 실제 실력보다는 연줄과 개인적인 친분으로 합격자를 선정하는 페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튼 지공거知貢擧가 합격자를 정해 발표하면 그는 큰 명예를 얻었기에 집안의 큰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급제자는 어사화御賜花가 달린 복두幞頭에 밝은 푸른색 옷인 앵삼鶯衫을 입고 화화革履를 신었습니다. 진사進仕 합격자와 옷만 다를 뿐 다른 것은 동일했지요. 대신 관리의 상징으로 쓰인 비단 허리띠 각대角帶를 두르고 황제의 도장이 찍힌 붉은 비단 합격증서 홍패紅牌를 손에 소중하게 쥐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은 물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지요.

급제자는 문서를 작성하고 정리하는 사록과 서기 업무부터 시작했다
급제자는 문서를 작성하고 정리하는 사록과 서기 업무부터 시작했다

여튼 3일 간 온 마을 사람에게 축하를 받은 급제자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 품계를 받고 임무를 맡았습니다. 1등인 장원 급제는 종7품부터, 2-3등인 을과 등은 각각 정8품과 종8품을, 나머지는 정9품과 종9품을 하사받았습니다. 그리고 급제자들은 중앙이 아닌 지방의 지방관 밑의 권무權務, 권지權知라는 일을 수행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인턴입니다. 어떤 일을 기록하고 정리해 문서화하는 사록司祿이나 서기書記 일을 수행했지요. 그렇게 최소 1년에서 5년 동안 인턴 생활을 하다 국가에서 관리 자리가 비면 불러 중앙으로 진출했습니다. 참 여러모로 당시의 급제자 모습이 지금의 전문직과 정말 유사하네요.
 
 
 

  • 예우 제도였지만 사실상 세습 제도였던 음서제蔭敍制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제는 음서로 관직을 받았다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제는 음서로 관직을 받았다

고려高麗 당시의 과거科擧 특징 중 하나는 음서제蔭敍制입니다. 이는 고려高麗 때 과거科擧를 치뤄 관리가 된 자들 중에 호족 출신이 꽤 있었기에 벌어진 일로, 호족 출신 관료는 은퇴 후에도 가문이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광종 후대의 황제와 거래해 얻어낸 것이 음서제蔭敍制로 5품 이상의 고위 관료는 자제를 음서蔭敍로 관리 자리를 줄 수 있었습니다. 아들, 손자는 물론 심지어는 사위도 음서蔭敍로 앉힐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음서蔭敍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 역시 최고등급인 재상까지였으니 사실상 뭐든 될 수 있었습니다. 명목 상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관료에게 주는 보답이지만 사실 상 고위직 관료들이 재산과 명예를 유지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음서로 관직을 얻은 자들도 결국 과거에서 급제해 본인 능력을 증명했다
음서로 관직을 얻은 자들도 결국 과거에서 급제해 본인 능력을 증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음서蔭敍로 관리가 된 자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부모 조상 덕을 봐 관리 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이후는 온전히 본인이 책임져야 했기에 본인 능력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는 일단 음서로 말단 자리를 얻고, 정식으로 과거科擧를 치뤄 급제하며 본인의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시험도 통과하면 아무도 뭐라 말을 못하니 가장 이상적인 엘리트 코스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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