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항해시대의 상징, 해적선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면 주인공 일당이 해적으로 전세계 바다를 누비며 모험을 하죠. 중간중간 트집잡으려고 덤벼드는 대영제국 동인도회사 군대는 상큼하게 박살내주고 스페인 함대도 부수고 해적끼리 서로 뒷통수도 치고 난리를 칩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배경은 대영제국이 스페인 제국이 잡은 대서양 항로를 뺏기 위해 영국 해적들을 지원해 스페인 제국 함대를 박살낸 뒤, 영국 해적들을 토사구팽하기 위해 토벌하고 다니던 때입니다. 그래서 대영제국 함대가 영국인 해적을 만나면 죽이려고 달려들죠.

여튼 해적의 모험을 다룬 [캐리비안의 해적]은 대항해 시대 당시 활개하던 유럽계 해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17세기에서 18세기에 북아메리카 카리브해 일대에 숨겨진 작은 섬을 본거지 삼아 유럽 선박을 약탈하고 다니던 영국계 해적의 이야기이죠. 이 영국계 해적은 태평양을 제외한 전세계 바다를 장악한 대영제국 해군을 쫒아다니며 대서양, 인도양에서 활개를 쳤답니다. 전성기에는 인도네시아 앞바다에서 깽판을 치기도 했죠. 때문에 영미권을 포함한 서양에서 해적하면 17~18세기 카리브 해적을 떠올린답니다.
- 유럽 해적 못지 않게 활발했던 동아시아 해적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동아시아에서도 막강한 해적들이 많았답니다. 특히 남중국해 일대에 해적들이 득실했죠. 그 이유는 우선 당시 세계의 시장이었던 중국 바로 앞마당이어서 각종 귀중한 자원들이 오가는 국제 물류 허브였고요, 일본, 중국, 베트남, 타이, 인도네시아 등 해군력 하나는 알아주는 나라들이 모이는 곳이었거든요. 거기에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대영제국, 프랑스가 후추를 찾아 인도네시아 앞바다까지 나오며 보물들을 싣고 다녔으니 해적 입장에서는 파도 위 노다지였죠. 그래서 중근세 동아시아 바다는 해적들이 활개하기 딱 좋은 바다였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나 아직 매체가 크게 주목하지 않는 남중국해의 지배자 해적들을 살펴보고자 해요. 중국과 일본 해적이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는데, 한국도 해적 당연히 있고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막강한 해적과 정규 해군들도 살펴볼게요.
- 한국의 해적 : 신라구

해적은 보통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해군 군사력이 약해질 때 발흥합니다. 배로 수송하는 나라 세금을 중간에 약탈해 빼돌리려고 해적 활동을 하는 거니까요. 한국도 해적이 활개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신라 말에서 후삼국시대로 가는 혼란기이죠. 일단 그 전에 장보고가 청해진을 세우고 남해안 일대의 당나라 해적을 소탕하고 거대한 해상 세력을 만들어놔 신라의 해군력이 강성했었습니다. 이후 장보고의 난 실패로 장보고가 숙청당한 이후 신라는 장보고가 남긴 해상 세력을 약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해군력이 강했죠.

이런 신라 해상 세력은 신라 말 전국에 호족들이 들고 일어난 군웅할거가 시작되자 고삐가 풀려 마구 날뛰었습니다. 한국 남해안을 유린하는 건 기본이고, 일본까지 가 약탈했죠. 현춘이라는 사람이 신라구 중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사람인데, 그는 신라 말 정부의 세금 독촉에 들고 일어나 남해안 일대를 파괴하고 약탈하며 신라의 조운로를 박살냈고,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 해안가도 침공해 약탈했습니다. 이후 쓰시마 섬 정벌에 나섰다가 일본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잡혔다고 하네요. 또한 수달로 알려진 능창 역시 막강한 신라구 지도자로 후백제의 수군으로 발탁되었죠.
- 일본의 해적 : 왜구

일본 해적 왜구에 대한 기록은 엄청 많아요. 삼국시대 초반 기록만 봐도 백제가 일본을 지원하고 일본이 왜구를 신라로 보내 신라 해안을 약탈하며 신라를 약화시키는 백제-일본 합동 작전이 심심하면 나오죠. 그러다 신라가 강성해지고 백제를 압도하면서 왜구의 신라 약탈은 줄어들고, 신라가 삼한일통을 한 이후에는 역으로 신라가 일본 해안가를 침공한 기록이 나와요. 신라가 남해안 일대를 차지하고 강한 수군을 양성하며 왜구 수가 급감합니다.

그 이후로 역으로 신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신라구가 일본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고, 고려로 삼한일통이 다시 되자 한국과 일본은 모두 해적 활동이 급감한 체 평화로운 시기를 보냅니다. 그러다 1336년 일본에 고다이고 천황과 고묘 천황 두 명의 천황이 등장하게 되고, 둘 중 하나만 천황으로 모시기 위해 고다이고 천황을 모시는 남조와 고묘 천황을 모시는 북조으로 나뉘어 내전에 빠졌어요. 작 지방의 다이묘들은 남조, 북조 중 한 세력에 가담해 서로 싸웠고 일본은 삽시간에 내전 상태가 되었죠.

그런 상황에서 일본 해안가는 통제력을 잃었고 왜구가 기승했죠. 그리고 남조는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왜구를 지원했고 일부 남조 다이묘는 스스로 왜구의 수장이 되었어요. 왜구는 더이상 일개 해적 집단이 아니라 일본 사병 수군이 되었고 전략적으로 고려와 원나라를 공격하고 약탈하며 물자를 챙겼죠. 이 때가 고려시대의 악몽인 고려 말 왜구 침입 시기에요. 왜구가 반도 남부 뿐만 아니라 평양 일대에도 나타나며 고려 전국을 휘젓고 다녔어요. 오죽하면 고려 수도 개경을 왜구가 포위해서 고려가 멸망할 뻔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다행히도 당시 고려에는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 두 영웅이 있었기에 고려가 왜구에 점령되는 걸 막을 수 있었죠.

중국도 원말명초 혼란기에 내륙은 내전이 일어나고 해안가는 왜구가 침입하던 막장이었어요. 그래서 중국의 교통 물류는 막장이 되고 재화와 물자가 흐르지 않아 전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홍건적이 득세했죠. 이 홍건적들이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냈고 해안가의 왜구와도 전투를 벌였어요. 심지어 베트남과 필리핀 해안에도 왜구가 나타나 약탈해 베트남에서 국가비상이 걸렸을 정도였답니다.

왜구의 침입은 홍건적이 막 베이징을 점령하고 원나라의 몽골 민족을 만리장성 너머로 쫒아낸 이후에도 지속되었어요. 홍건적이 몽골을 추방하고 세운 명나라 초기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왜구가 자꾸만 나타나자 명나라 조정이 해안가에서 일정 거리 내에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해금령을 내릴 정도였죠. 이 혼란은 일본이 무로마치 막부로 통일되고 명나라 국력이 회복되고 조선이 적극적으로 왜구를 토벌하며 끝났답니다.

남은 잔당도 일본이 명나라와 교역을 하며 안정적인 무역로를 찾아 경제가 성장하며 사라졌어요. 근데 1467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며 전국에 다이묘들이 난리를 치고 무로마치 막부는 권력이 땅에 떨어지며 일본에 지옥같은 시기 센고쿠 시대가 열렸어요. 당연히 바다 무역로는 개판이 되었고 해안가 다이묘들이 왜구가 되어 난리를 쳤죠. 이 떄는 일본 안에서 왜구들이 난리를 치던 시기였답니다. 이들은 일본 내 적국으로 삼은 다이묘 영토를 침공해 인력을 납치하고 물자를 뺏아 다이묘 세력을 약화시켰고 다른 다이묘의 용병이 되어 수군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센고쿠 시대 종료 후 임진왜란에서 수군으로 활약했죠. 다 이순신에게 처참히 패했지만요.

임진왜란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에도 막부가 설립되자 에도 막부는 동남아시아와 직접 교류하는 남만무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요. 남만무역은 포르투갈인이 주력으로 하던 무역인데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 가문이 남만무역을 적극 받아들였고 일본에 혼란기가 끝나자 제대로 무역을 시작했죠. 덕분에 많은 일본 상인이 베트남, 타이,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항구에 가 무역 활동을 했고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가까워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트남 호이안에 있는 꽈까우(내원교)이죠. 호이안 내 일본인 마을과 중국인 마을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일본 상인들이 지은 다리로 베트남 항구에 일본인 무역상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유적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일본인이 남중국해를 오가며 무역을 했음은 남중국해에 왜구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당시 왜구들은 중국 남부 해안가와 베트남 해안가를 알짱거리며 약탈을 했어요. 그리고 남중국해로 무역하러 들어온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대영제국 무역선도 약탈했고요. 이는 임진왜란 전부터 흔하게 일어나던 일이었어요. 예로 1574년 왜구가 스페인령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 앞까지 와서 공격하자 명나라 수군과 스페인 군대가 합심해 왜구를 막기도 했고 이후로도 수많은 무역선이 왜구 사략선을 격파한 기록이 있어요.
- 중국 해적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전국이 내전상태에 빠지는 혼란기에 해안가 지역민들이 무장을 하고 배를 타며 해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후한 말 황건적의 난으로 전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전국에서 군웅할거가 시작되었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해안가에는 한나라 군대 장수들이 들고 일어나 해적이 되었죠. 그리고 그들 상당수가 오나라 손권의 휘하로 들어가 오나라 수군 주력이 되었어요.

이 혼란은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겨우 진정되었나 싶더니 이어 중국사에서 가장 막장 시대인 5호 16국시대가 열리며 해적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답니다. 이 혼란은 몇백년 간 지속되다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잠잠해지려는 듯하더니 수양재의 폭정으로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해요. 이는 수나라 멸망 후 당나라 건국 후에 전성기를 맞이해 한반도까지 진격해 약탈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걸 신라 장보고가 격퇴하며 청소한 것이고요.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천하가 5대 10국으로 분열할 때 다시 해적이 나왔으나 5대 10국이 빠르게 안정화되어 송나라가 건국되고 경제가 성장하며 해적은 사라졌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잠깐 일본의 왜구가 명나라 땅에 기승을 부리고 명 정부가 해금령을 내리며 명나라 땅에 슬슬 해적이 등장해요. 그리고 나중에는 병사들은 일본 출신인데 지휘관은 명나라 사람인 후기 왜구가 등장합니다. 일본 왜구와 협력하며 중국 해안가를 유린하던 왕직이 대표적인 예시이죠.

그리고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 땅으로 진격할 때도 해적이 등장했어요. 남명 왕조를 이끈 정성공 가문이 대표적인 명나라 해적으로 일본 왜구들의 본거지이자 네덜란드 상인들이 식민지로 만든 타이완 해안가를 점령하고 타이완을 본거지로 중국 해안가를 기습 공격했지요. 정성공은 타이완 섬에 요새를 지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군대를 격퇴하고 선진 화포로 무장한 해적선을 운용하며 난징 일대까지 진격해 명나라 부흥운동을 벌였어요. 하지만 끝내 청나라에게 패배했지요.

정성공 같이 큰 뜻을 품은 해적왕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중국계 해적은 그저 청나라의 토벌을 피해 바다로 도피한 해적이었어요. 청나라 정부에서 바닷가에 허가증 없이 돌아다니는 자는 무조건 참수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살려고 바다로 도망친 중국 해적은 마침 후추를 찾아 무역하던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함대를 노리고 공격하며 먹고 살아요. 거기에 일본의 남만외교와 손을 잡아 무역으로 먹고 살기도 했고요.

그러다 베트남에서 찐 왕조와 막 왕조, 응우옌 왕조 간 개싸움에 진절머리가 난 농민들이 떠이선 봉기를 일으키자 베트남에 급격한 변화가 와요. 정규 왕조던 세 왕조와 달리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결성한 떠이선 군은 해군력이 약했고 왕국의 수군이 바다를 건너 본진으로 침공하는 걸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이선 군대는 마침 동낀 만(현 통킹 만)에서 어슬렁거리던 중국 해적을 떠이선 수군으로 채용해 다른 왕조들 본거지에 상륙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발휘해요.

기습 공격과 화포 공격으로 무장한 중국 해적은 베트남의 다른 왕조들을 기습 공격하며 격퇴했고 떠이선군의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해요. 그리고 떠이선 봉기군은 떠이선 왕조를 세웠고 캄보디아가 차지한 아주 좋은 메콩강 하구 지역에 중국 화교 무역상들과 해적들을 일부러 보내고 땅을 사유하는 걸 허락하며 은글슬쩍 떠이선 왕조의 땅으로 만들어버리죠. 또한 중국 해적의 교리와 무기를 받아들여 떠이선 정규 수군을 양성합니다. 그리고는 딘꿕Định Quốc이라는 흉악한 전함을 만들어 인도차이나 연안과 강에서 무쌍을 찍어버리죠.

베트남에서 중국 해적이 활개하는 동안 청나라는 수군 양성에 소극적이었어요. 그래서 중국 해안에는 해적이 더더욱 날뛰었죠. 특히 홍콩에 중국 해적 연맹이 결성되어 홍콩을 중심으로 주변 항구와 베트남 항구에 중국 해적이 출몰하며 유럽 무역선을 약탈하고 심지어 유럽 동인도회사의 해군을 격파하며 세를 떨쳐요. 이 때 위세가 너무 대단해서 청나라 뿐만 아니라 막 날뛰는 떠이선 왕조를 격퇴하고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 왕조도 군사를 보내 토벌하지 못해요. 결국 무역망이 유린되는 것에 빡친 대영제국이 1849년 당시 최첨단 무기였던 철갑선까지 동원해 대영제국-청-응우옌 연합 함대를 결성하고는 베트남 북부 동낀 강 하구에서 십오자 휘하의 중국 해적을 토벌할 정도였어요.

그럼에도 중국 해적은 계속 남중국해에 진입하는 유럽 선박들을 약탈했고 유럽은 힘을 합쳐 중국 해적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죠. 이 청나라 때가 중국 해적 전성기로 1800년대 초반에 활약한 여성 해적왕 정일수는 특히나 유명합니다. 1,000척의 해적선에 5만명 이상의 해적을 거느린 정일수는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 일대를 오가는 유럽 무역선을 약탈하고 토벌하러 진격한 유럽 해군 함대를 모조리 격퇴해 중국 해안가 일대에 유럽 식민제국의 해군이 오는 걸 막았어요. 이 때문에 청나라 조정에서도 정일수는 특별사면했고, 그녀는 노년에 마카오에 정박해 해적 본거지로 삼고 카지노를 만들어 부를 굴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마카오는 정일수가 만든 거에요.

이렇게 남중국해 일대를 주름잡던 중국 해적도 결국은 황혼기가 찾아오죠. 중국 해적의 기승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격던 유럽과 미국이 함대를 보내 지속적으로 해적 토벌작전을 벌이기도 했고, 청나라 조정도 해적을 토벌해요. 그래서 정일수 시대가 지난 뒤 막강하던 중국 해적은 점점 약해졌죠.

이렇게 사방에서 포위하며 중국 해적이 약해지고, 결정적으로 당시 해군력 최강국이던 대영제국이 1840년부터 대영제국 주력 함대를 이끌고 중국을 공격한 아편전쟁을 일으키며 막강한 대영제국 해군력으로 중국 해적도 대규모 토벌하고 재해권을 장악하며 해적이 사라졌답니다.
- 술루 해적

필리핀과 보르네오 섬 사이에 갇혀있는 작은 바다 술루 바다는 그 폐쇠적이고 섬이 많은 특징 때문에 동남아시아 해적들의 본거지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무슬림 해적으로 이슬람이 아닌 힌두교 신자들을 납치해 노예시장에 파는 해적들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동남아시아에 퍼진 힌두교 국가와 사람들을 공격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있는 후추를 찾아 진입하자 유럽 선박을 공격해 후추를 약탈하고 대신 팔며 돈을 벌기도 했죠.

게다가 이들은 인도네시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거대한 군도 사이를 오가는 해양민족이었기에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빠삭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는 무역상으로 활동하다가 제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혼란이 찾아오면 곧바로 해적으로 변모해 다른 지역을 약탈하며 생계를 이어갔죠. 골수 해양 민족이라 노, 돛이 발달했고 아주 빠른 속도로 항해하는 것이 가능했어요. 그 덕분에 저 멀리에서 순식간에 목표 선박에 다가가 공격이 가능했죠.

거기에 말레이 제도는 동아시아보다 일찍 화포 무기를 받아들였어요.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명나라가 유럽 총을 받아들이기 100년전부터 말레이 제도 인근에서는 서로 신명나게 총을 쏘고 난리였거든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서 총과 소형 대포를 수입하고 자체 생산하며 선박에 소형 대포와 총으로 무장했어요. 그리고 그걸 유럽 무역선에 신나게 쏴댔죠.

술루 해적 역시 중국 해적과 비슷하게 18세기에 크게 활약했어요. 목표물은 후추와 금을 가득 실은 유럽 무역선이었고, 화포로 무장한 유럽 무역선을 공략하기 위해 선체는 낮고 속도는 매우 빠르며 위에서 저항하는 사람만 공격하는 소형 화포로 무장했어요. 그리고는 스페인 무역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무역선, 포르투갈 무역선을 집중 공략했답니다.

이런 랑타카 소형포를 배에 배치하고는 무역선에서 사람이 있는 선체 윗부분만 신나게 쏴대서 방어 병력에 큰 손실을 입히고 배 위로 올라타 소탕한 뒤 보물만 쏙 빼가거나 배 자체를 약탈했답니다. 이들이 극성을 부릴 때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매출을 걱정하고 청나라에 원정을 요청할 정도였어요.

근데 저 술루 해적 전성기 때는 청나라도 해적의 진입을 두려워해서 술루 무역상들이 청나라 항구에 진입하지 못하게 막을 정도였답니다. 결국 술루 해 주변 정부에 요청을 해 소탕전을 벌였어요. 정부군은 작지만 빠른 기동성과 화포로 무장한 게레이 군선을 가지고 있었고 빠른 해적선에 접근이 가능했어요. 문제는 일부 게레이 군선은 배신하고 해적 편에 서 유럽 무역선을 약탈했죠.

결국 이에 제대로 화난 유럽이 주력 함대를 이끌고 술루 해의 해적 본거지를 돌아다니며 소탕전을 벌여요. 근데 기존 목선으로는 안되니 아예 첨단무기인 거포로 무장한 증기선을 이끌고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칩니다. 스페인 왕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적극적으로 소탕 작전을 수행했고, 육지는 전부 식민지로 만들어 통제권을 얻은 뒤 육지에 숨은 해적을 소탕하며 씨를 말려버리는 것으로 끝냅니다.

이렇게 술루 해에 본거지를 잡고 인도네시아 제도, 말레이 해협, 남중국해를 휘젓고 다니며 악명을 높인 술루 해적이 사라집니다. 해양민족의 해적질은 이렇게 끝이 나죠. 한 때 중국과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해적은 사라지고 기록도 많이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게 한편으로는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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