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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은 혼란기 끝에 프랑크인들의 왕국으로 안정화되었습니다. 서기 800년 독일을 지배하던 프랑크인 왕 카롤루스 1세는 교황 레오 3세에게 황제의 관을 받고 서로마제국의 부활을 선언하며 로마 가톨릭을 수호하는 황제국으로 등극했습니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로마 제국의 대를 이어받는 후계자가 등장한 순간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후 중세 유럽의 가톨릭 중심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스위스의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가문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대가 끊기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신성로마제국을 이끌 새로운 가문으로 등장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황제가 선출되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영지를 확장했습니다.
황제의 가문이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혼인동맹으로 유럽 전역에 가문 영지를 넓혀갔고 오스트리아와 중부유럽을 비롯 유럽 전역을 지배한 최대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을 수호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16세기 남쪽에서 이슬람 국가 오스만 제국의 오스트리아 공격과 서유럽의 종교개혁으로 촉발한 개신교 세력의 독립으로 가문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17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개신교 독립운동을 벌인 네덜란드를 잃었지만 두차례의 오스만 제국 공격을 막아내고 대튀르크 전쟁과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으로 헝가리, 트란실바니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갈등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7년 전쟁으로 독일과 서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잃고 중부유럽의 패권국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여전히 보헤미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 등 많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나폴레옹 전쟁과 흔들리는 오스트리아 제국
19세기 프랑스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자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여러 민족의 왕 노릇을 하며 합스부르크 왕가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민족주의는 여러 민족의 독자 국가 건설을 부추겼습니다.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를 공격해 민족주의 열풍을 막으려 했지만 프랑스에서 등장한 나폴레옹은 합스부르크 왕군을 격파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유럽의 방해를 물리친 나폴레옹은 1804년 교황의 허가 없이 독자적으로 황제로 즉위해 프랑스 제국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반발해 전통의 황제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공국을 중심으로 제후국을 통합해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습니다.
1805년 유럽 국가들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어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공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를 격퇴하고 신성로마제국을 완전히 해채한 뒤 프랑스 제국의 괴뢰국 라인동맹을 만들었습니다. 오랜 기간 서유럽에 존속했던 신성로마제국은 이렇게 멸망했습니다.
유럽 연합국을 홀로 격퇴하며 무패 신화를 만들어간 나폴레옹은 유럽국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적의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며 유럽국가들이 다시 한번 나폴레옹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오스트리아도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해 나폴레옹을 완전히 격퇴했습니다. 그리고 빈 회의를 열어 나폴레옹이 만들고자 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기로 했습니다. 빈 회의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1815년부터 빈 회의 결과 만들어진 빈 체제로 제국 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하며 제국의 해체를 막았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주요 민족인 게르만인[오스트리아계, 독일계] 외에 머저르인[헝가리계], 이탈리아인[이탈리아계], 슬라브인[체코슬로바키아계, 폴란드계, 루마니아계, 우크라이나계, 크로아티아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있어 민족 독립운동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민족주의를 외치며 통일하자 오스트리아 제국 내 이탈리아 민족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이탈리아인 지역을 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제국 헤체를 막는 봉합책: 동군연합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 전쟁으로 이탈리아인의 독립을 허용했고 이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독일 연방의 맹주 자리를 뺏겼습니다. 약체 국가임을 들통난 오스트리아 제국은 구성 민족들의 활발한 민족 자치권과 연방제 요구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해체를 막아야 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게르만인[오스트리아인]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머저르인[헝가리인]과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머저르인은 1840년부터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벌였고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독립을 막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머저르인의 세력 헝가리에 자치권을 대폭 향상시키는 대타협을 이루어냈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동군연합으로 변모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탄생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의 자치를 인정해 머저르인의 불만을 잠재웠고 제국의 주요민족이었던 게르만-머저르 민족은 제국의 해체를 막기 위해 타민족들을 탄압했습니다. 제국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슬라브인들을 탄압했습니다. 그 중 독립 민족국가가 존재한 세르비아인과 루마니아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탄압대상이었습니다.
- 발칸반도로 팽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중유럽에 위치하며 상대적으로 빈약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범 이후 세계는 이미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청나라를 제외한 전세계에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서유럽 열강들과 충돌 대신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오스만 제국의 긴 통치기간을 막 끝낸 발칸국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바로 아래 위치한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적대적인 의사를 마구 표출했습니다.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보스니아는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 통치령이 되었습니다. 보스니아에는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세르비아 왕국은 보스니아를 세르비아 왕국으로 합병하기를 원했습니다. 발칸반도를 손에 넣으려고 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8년 발칸 독립국의 적 오스만 제국이 청년 튀르크당 혁명으로 혼란에 빠져 발칸 독립국이 오스만 제국에 관심이 쏠려 있을 때 보스니아를 재빨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으로 선포해버립니다. 보스니아를 뺏긴 세르비아 왕국과 세르비아의 우방국 러시아 제국은 이에 반발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무시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행보에 발칸 독립국들은 분노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불신했습니다. 더불어 동방의 슬라브 민족 강대국 러시아 제국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북방의 강대국 독일제국과의 동맹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합병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공분을 샀고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사건 이후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선포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의 우방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치뤄야 했고 동맹국 독일제국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이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다음 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또다른 적이자 민족주의에 강력한 영향을 받은 신생 통일 국가 이탈리아 왕국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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